반세기 전 ‘불모지’ 관광산업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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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중 세방여행 회장. |
오세중이 1960년에 창업한 세방여행은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며 세계 인류의 휴식 공간과 삶의 가치를 높이고, 더욱 더 풍요롭고 행복이 가득한 미래의 관광을 창조하고자 하는 이념을 최우선으로 내걸었다. 쉽게 말해 여행은 행복의 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했다. 하지만 한국은 1961년 5·16 군사혁명 당시 하루 외무부에 신청되는 여권이 60명밖에 안 됐다. 여행관광은 없었고 여행사는 비행기표 한 장 파는 것이 전부였을 때 오세중은 세방여행을 세운 것이다. 워커힐 호텔도 1962년 5·16후에 건립되었고 지금의 조선호텔도 1973년 3월에 완공,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프 커팅 행사에 참석할 정도였다.
오세중은 1929년 황해도 해주에서 3000석 지기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큰할아버지 오국동 공이 설립한 해주고보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에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고학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중 부산 피란 시절에는 국제신보 기자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1·4후퇴 때는 연평도 8240부대에서 참전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무신경한 요즘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국토방위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종전된 후 누구나 그랬듯이 사회 진출을 모색하던 끝에 한국에 들어오는 유일한 항공노선으로 걸음마 단계에 있던 노스웨스트 항공에 입사했으나 곧 국영기업인 한국 유일의 대한여행사에 입사하게 된다. 이때부터 오재경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오재경은 대한여행사 이사장이었다.
당시 한국은 4·19 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붕괴하고 장면의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지만 늘 그렇듯이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인사개편에 오세중은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1960년 11월 18일 오세중은 세방여행을 창업해, 작은 시작이었지만 대한민국 여행업의 새로운 신화를 자기 나름대로 쓰기 시작한다.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104호실이 세방여행사가 출발한 곳이다. 그때 반도호텔은 한국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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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서울 IOC총회에서 오세중 회장의 아들 오창희 사장과 피아니스트 김혜정 부부가 사마란치, 필자와 만났다. |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는 한국관광의 신기원을 가져왔고 그간 세방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전세계약, 항공 화물계약도 체결했다. 드디어 1970년 이후 세방은 계속 여행업계 1위에 오르고 1973년에는 495만 5364달러의 외화를 획득했다. 이때 한국의 수출 총액이 1억 달러 내외를 맴돌 때였으니 엄청난 매출 규모였다. 참고로 세방 아래로 한진, 서울교통, 한화, 하나 등의 기업이 있었다.
세방은 급증하는 관광객을 위해 시티투어(City Tour)도 개발했다. 이어 1983년에는 패키지 투어도 선보였다. 맞춤형 관광인데 안내양도 처음으로 채용해서 훈련시켰다. 이와 같이 한국 최초로 관광여행사를 개시한 오세중은 시대의 흐름과 경제발전에 맞추어 아시아로 세계로 무엇이든 최초의 기록을 내고 달렸으나 2001년 미국 앨라배마 주립대학 병원에서 심장 수술 후 회복이 안 돼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당시 필자는 수술을 안 했으면 몇 년 더 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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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 때 오창희 사장, 필자, 질라디 IOC 위원이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
오세중은 과묵하지만 소신 있는 분으로 느껴졌다. ‘서울 로타리(Rotary Club)’라고 영어만 쓰는 로타리 클럽이 신라호텔에서 매주 수요일 열렸다. 오재경, 한미재단의 하지스 박사 등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고, 오세중은 여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런 식으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해 일본관광업계, 세계관광기구까지 유대를 넓혀갔다. 그 당시에는 드문 일이나 그런 국제활동이 오늘날 세방과 한국관광에 자산이 됐다. JTB, JAC PAK, 긴킹관광, 일본 로얄 파크 그룹, 힐튼 그룹 등을 바탕으로 인바운드(Inbound, 외국인의 한국관광)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즉 세방은 내보내는 손님도 많아야 하지만 들어오는 손님 끌기가 주였다.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 외화 획득을 많이 한 것이었다.
1993년 필자가 대한체육회장, KOC위원장으로 피선된 후 한국도 서구식 마케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IOC TV위원장, 그리고 IOC 부위원장으로 세계 시장의 스포츠마케팅을 보아 왔지만 한국은 아직 형편없었다.
마침 대한체육회 차원에서도 올림픽이나 국제경기 관련 여행이 잦아졌다. 특히 올림픽 등은 IOC도 그렇지만 공식여행사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됐다. 겨우 아주관광에 에이전시를 맡겼지만 얼마 안 가서 회사 영업 부진으로 탈퇴해 버려 여행사를 새로 구해야 했다. 누구나 그때는 손 안대고 코 풀려 할 때라 쉽지 않았는데 오세중의 세방여행이 나타나 스폰서비를 내고 1997년에 KOC의 공식 여행사가 되어 주었다. 그때는 오세중이 별로 이윤도 안 보이는데 무리하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필자는 아쉬운 처지였기에 받아들였다.
오세중 사장의 장남 오창희는 일찌감치 관광 분야의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일본, 그리고 미국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힐튼 등에서 연수를 했다. 학교도 미국의 최고 명문인 UC 버클리 대학,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에서 각각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오세중은 장남을 본사에서 밑에서부터 경험을 쌓고 올라가도록 했다. 오창희는 1996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김혜정 교수와 결혼하고 2001년 오세중 사망 후에는 사장이 돼 21세기 세방을 이끌고 있다.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것처럼 가족주의자인 오세중의 힘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족에서 나온 것 같다. 그는 부인 백남희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오창희, 오상희, 오은주)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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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당시 세방 사옥. |
오세중 사장의 뒤를 이은 오창희 사장도 JC의 서울회장, JC의 세계수석 부회장, SKAL 회장, 대한 트라이슬론 연맹 부회장 등 사회활동을 넒혀 가고 있다. 또 외교에 제일 중요한 천성적인 인품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느 나라를 가건 그곳 여행기구와 주요 호텔 등과 연결을 맺고 끊임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한 것이 한국관광여행개발에 밑거름이 된다.
세방여행 창립 50주년은 일본 굴지의 로열 파크 그룹의 나카무라 유타카 회장을 비롯해 중국, 일본, 미국, 마카오 여행업계 대표만도 50명이 참석하는 등 대성황리에 치러졌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50년 역사의 여행사가 나온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다.
한국 관광여행업계의 역사에 오세중은 지우기 힘든 족적을 남겼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을 알린 한국의 관광여행업계의 선구자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는 검소했고, 크게 성공했으면서도 결코 잘난 체도 하지 않았다. 속이 꽉 찬, 그리고 나름대로의 국제감각과 비젼을 가진 ‘여행을 사랑한 선구자’였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