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로의 빈 자리 단박에 꿰차다
1940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녀의 본명은 ‘조 라쿠엘 테하’다. 아버지는 볼리비아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다.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웰치는 항상 어떤 해방구를 꿈꾸었다. 틴에이저 시절 수많은 미인 대회에 참가했던 게 그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키우기로 작정한 그녀는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면서 지역 방송국에서 기상 캐스터로 활동한다. 그녀는 일이 바쁘다며 학교를 그만두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58년, 18세의 웰치는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제임스 웰치와 결혼한 것.
스무 살에 첫 아들을, 스물한 살에 첫 딸을 낳은 웰치의 결혼 생활은 거기서 막을 내린다. 사랑이 너무 빨리 식어 버린 것. 웰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댈러스로 가 홀로 서기를 시도한다. 백화점 모델, 웨이트리스, 바텐더 등을 거치며 힘겹게 살아가던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이곳저곳 오디션에 도전한다.
37-23-36의 깎아지른 듯한 몸매에 이국적 외모의 웰치는 언제나 비키니 차림의 배역으로 단역을 전전했다. 1965년 <스윙잉 썸머>로 20세기폭스의 눈에 뜨인 그녀는 전속 계약을 맺게 되고, 다음 해 <공룡 100만년>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다. 인류가 등장하던 신생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옷을 입은 그녀는, 마릴린 먼로의 죽음 이후 섹스 심벌의 공백 속에서 미국인들 앞에 나타난 새로운 여신이었다.
미식축구 출신의 흑인 스타 짐 브라운과 공연한 <100 라이플스>(1969)는 인종간 섹스 신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트랜스젠더로 등장한 <마이어러 브레킨드리지>(1969)는 컬트적 추앙을 받았다. 1970년엔 <라쿠엘>이라는 TV 스페셜이 제작될 정도였고 1980년에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는 1970년대를 통틀어 “남자들이 가장 욕망하는 여성”으로 그녀를 선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파로 거듭나진 못했다. 섹스 심벌로 전형화된 이미지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토플리스 누드를 감수하고 출연했던 <캐너리 로>(1982)는 촬영 중에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40대 여배우가 하기엔 너무 젊은 역할에 미스 캐스팅되었다는 이유였다. 웰치는 소송을 걸어 1100만 달러의 위자료를 받았지만 할리우드에서 그녀는 서서히 밀려나는 분위기였다.
웰치는 다양한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인포머셜(요즘의 홈쇼핑을 연상시키는 제품 해설식 광고)에 등장했고, 라스베이거스 쇼로 진출했으며, 브로드웨이에서 성과를 얻었다. 제인 폰다가 에어로빅 열풍을 일으키자 못지않은 ‘몸짱’인 웰치는 뷰티와 피트니스에 대한 책을 냈다. 특유의 헤어스타일을 내세워 미용 가발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녀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미국인들에겐 항상 섹스 심벌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 된 전통이고, 나도 섹스 심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되면, 내실 있는 커리어를 쌓기 힘들며 단명한다. 나는 그 위기의 시기를 견뎌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녀가 위기를 극복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젊게 살 수 있었던 데엔 로맨스도 큰 역할을 했다. 네 번 결혼했지만 네 번 이혼한 후 현재 싱글인 그녀는 숀 코너리, 스티브 매퀸, 워런 비티,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로커인 앨리스 쿠퍼까지 당대의 ‘카리스마 남’들과 관계를 맺었다. 연하남과의 관계는 파격적인데 디자이너인 론 탤스키는 20세 연하였고, 56세 때 만났던 권투선수 게리 스트레치는 25세 연하였다. 그녀는 게리의 아버지와 동갑이었고 자신의 아들보다 어린 남자와 연인 관계였던 셈이다.
올해 71세가 된 여배우는 이렇게 말한다. “20대 초반 때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저랬을 때가 있었구나’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난 지금의 내 얼굴이 그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