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철 키도 실력도 폭풍성장
‘대한민국’ 넉자를 가슴에 새기고 그라운드 곳곳을 누빈 태극전사들. 카타르 아시안컵은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지만 이들의 투혼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선사했다. 수확도 있었다. 구자철(제주유나이티드ㆍ22), 지동원(전남드래곤즈ㆍ20), 윤빛가람(경남FCㆍ21), 이용래(수원삼성ㆍ25) 등 걸출한 신인을 발굴해낸 것. 이들 4인방은 아시안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 축구의 ‘미래’를 쐈다. ‘젊은 피’를 등용한 조광래호의 출범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아시안컵 최대 발견으로 꼽히는 이들 4인방의 축구 인생 스토리가 궁금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새기기까지 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겨운 노력을 부모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 ‘절묘한 타이밍’
구자철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구자철 아버지 구광회 씨(51)는 아들의 축구 입문에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자철이가 형과 충주 사과 마라톤 대회에 나갔을 때였다. 마침 축구부 아이들과 대회에 참가한 인근 중앙초등학교 감독이 자철이를 알아보고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 일이 학교에 소문이 나서 담임선생님이 자철이가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며 반 친구들에게 작별인사까지 시켰다더라. 다른 학부모로부터 그 이야길 듣고 깜짝 놀라 물으니 ‘아빠. 저 축구하고 싶어요. 열심히 할게요’라며 주먹을 꼭 쥐고 말하더라. 내가 반대할까봐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던 거였다.”
이후 구자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다. 축구 실력에 비례해 키도 컸다. 중학교 때만 해도 구자철의 키는 146㎝에 불과했다. 체질상 우유가 맞질 않아 걱정이 많았다고. 그러나 축구를 하려면 무엇보다 신체조건이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구자철은 복통을 참아내며 하루 1ℓ씩 6개월간 꾸준히 우유를 마셨다. 운동장에서 물 대신 우유를 마시고 친구들이 먹기 싫어 숨겨둔 우유까지 찾아 마실 정도였다. 덕분에 3년 만에 키가 무려 37㎝나 자랐다. 워낙 발재간이 좋은 데다 체격까지 좋아지니 또래 중에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진로를 고민할 때마다 행운도 따랐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입단을 제의했던 연세대학교에서 갑작스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일본 진출을 시도해봤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자철이가 고등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백록기 대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했다. 굳은 의지가 느껴져 그 날로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축구를 향한 열정은 그에게 귀중한 기회를 선물했다. 우연찮게 백록기 대회를 관전하던 당시 제주 유나이티드 정해성 감독의 눈에 띈 것. 구자철에게 매료된 정 감독은 정식으로 드래프트를 제안했고,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날개를 단 그는 대표팀에 승선해 마침내 날아올랐다.
# 추자도 스트라이커
아시안컵에서 박주영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우며 한국의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떠오른 지동원. 그의 고향은 제주도 인근의 작은 섬, 추자도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이 작은 섬에서 그는 바람을 마주하며 축구를 배웠다. 지동원의 아버지 지중식 씨(50)는 “어릴 때부터 육상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공을 차기 시작했다. 마냥 열심히만 뛰어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표팀 주전 선수라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며 미소를 짓는다. 제주 오현중학교를 졸업한 지동원은 축구 명문 전남 광양제철고에 들어갔다. 내로라하는 축구 유망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실력을 키우던 그는 대한축구협회 우수선수로 선발돼 잉글랜드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1년간 외국 선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극을 받은 지동원은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웨이트 트레이닝과 기본기 훈련에 집중했다.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전남에 입단한 그는 매 경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K리그를 빛냈다. 28경기에 나서 8골 4도움을 올리며 전남의 간판 공격수로 자리매김했고, FA컵에서는 5골로 득점왕이 됐다. 국제무대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2009년 10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선수권에 출전해 2골을 넣었고,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 이란과의 3·4위전에선 막판 두 골을 터뜨리며 극적인 역전승(4대3)의 주역이 됐다.
지 씨는 “평일에 경기가 열리면 휴가를 내서라도 빠지지 않고 보러간다. 아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기 때문이다. 특히 아시안게임 이란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며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아들 경기를 보기 위해 1년에 30일 되는 휴가를 모두 반납한 지 씨지만 축구장 밖에선 엄격한 아버지다. “동원이가 ‘자동차를 사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작은 것에도 자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시안컵에서 수고한 아들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는 부정을 드러낸다.
# 부상 이긴 한 편의 드라마
이용래는 한국 축구를 책임질 유망주였다. 신생팀 유성생명과학고를 2년 만에 전국 최정상에 올려놓을 때만 해도 축구계에서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한축구협회 우수 선수로 선발돼 프랑스 FC메츠 연수를 받고 올 정도로 각광받는 선수였다. 그를 발굴한 유성생명과학고 홍위표 감독은 “키가 작은 것만 빼면 정말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기초가 탄탄하고 드리블이 좋아 어느 포지션에서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구력도 뛰어나 경기 막판까지 운동장을 휘젓고 다녔다. 훈련이 끝나도 항상 공을 가지고 개인 연습을 할 정도로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비상은 여기까지였다.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6개월 이상 걸리는 발목 부상을 당했고, 자신감을 상실한 이용래는 더 이상 날아오르질 못했다. 대학 4년 내내 부상에 시달린 이용래는 K리그 스카우터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결국 그는 경남FC로부터 번외지명을 받아 연봉 1200만 원을 받는 연습생 신분이 됐다.
이용래 어머니 황수향 씨(53)는 “번외지명 이야길 듣고 한동안 아들에게 연락을 못했다. 며칠이 지나서 겨우 전화를 걸었더니 울었는지 목소리가 잠겨있더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용기를 줬다”며 가슴 아팠던 드래프트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경남 FC 수석코치로 있던 윤덕여 코치는 “경남에 와서 독기를 품고 치료와 훈련을 병행했다. 어렸을 때부터 용래를 지켜봤기 때문에 곧 부활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면서 아시안컵에서 결실을 맺은 제자를 흐뭇해했다.
# ‘빛가람’ 뜻을 아시나요
윤빛가람. 이는 그의 아버지 윤명두 씨의 고심 끝에 탄생한 이름이다. 윤 씨는 “한 번만 들어도 모든 이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한글 이름으로 짓고 싶어서 ‘좋은 이름 짓는 법’이란 책까지 샀다. 어렸을 땐 친구들이 놀린다며 이름을 바꿔달라고 하더니 커가면서 점점 마음에 들어하더라”며 작명에 얽힌 비화를 소개했다.
가정 형편상 축구 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윤 씨는 아들만큼은 축구선수로 키우고 싶었단다. 마침 초등학교 3학년이던 윤빛가람이 축구하고 싶다는 얘길 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고. 이후부터 윤 씨의 혹독한 레슨이 시작됐다. “심하게 야단치며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도 아빠를 별로 안 좋아한다. 지난 번 K리그 시상식에서 신인왕을 차지했을 때 ‘아빠 사랑합니다’라는 이야길 듣고 그래도 아빠 맘을 알아주나보다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2007년엔 당돌한 발언으로 축구팬들의 뭇매를 맞았다. U-17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포토 데이 행사 중 “K리그는 경기 속도가 느려서 서울-수원 같은 라이벌 전이 아니면 잘 안 보게 된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된 것. 이후 발목 부상까지 겹쳐 2년 간 대학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일어선 건 조광래 감독의 경남FC에서였다. 빠른 패스 위주의 경남FC에서 윤빛가람은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나갔고, 조광래의 ‘황태자’란 호칭답게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떠올랐다.
4인방 모두 가고 싶은 구단으로 스페인 바로셀로나를 꼽는다. 스페인식 축구를 지향하는 조광래호에서 맹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비결일지도 모른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무대를 빛낼 이들의 비상을 기대해본다.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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