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번트’로 물러난 후 화려한 부활?
▲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14일 국민권익위원회 업무보고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양건 권익위원장과 회의장에 들어서고있다. |
감사원장 후보자로 양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4)가 내정됐다. 지난해 9월 김황식 당시 감사원장이 국무총리로 내정되면서 공석이 된 지 5개월, 정동기 후보자가 전관예우 논란 및 당청 간의 갈등으로 낙마한 지 1개월여 만이다.
감사원장직은 업무의 특성상 다른 공직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보직임에 틀림없다. 이를 감안한 듯 양 내정자는 “나라가 더 잘살기 위해서는 국가 청렴도가 더 향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국정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국 경제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공직사회의 부패를 막는 것은 경제살리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양 내정자에 대해 국가경쟁력 향상과 공정한 사회를 통해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기 위한 공직기강 확립에 최적임자라고 설명했지만 그가 감사원장으로 낙점되기까지는 몇 가지 고비를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감사원장 자리를 수락하게 된 배경에 대해 양 내정자는 앞서 맡았던 1년 5개월 동안의 국민권익위원장직의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다. “국민권익위원장을 맡았을 때 부패방지 업무에 상당히 역점을 뒀는데 법률 제도상 권익위의 부패방지 권한이 상당히 제한돼 있다. 부패 혐의에 대해 직접 조사권도 없는 것에 비하면 감사원은 광범위하고 강력한 권한이 있기 때문에 미진했던 부패방지 업무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자리라고 판단했다.”
공직자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제재기능을 가동해 반듯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양 내정자의 포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양 내정자는 감사원장에 내정된 후 가진 인터뷰를 통해 “특히 근자에 고위공직자 비리사건들이 계속 보도되고 있는데 이런 현상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감사원의 당면한 주요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며 공직자에 대한 비리점검이 감사원의 당면과제임을 강조했다.
양 내정자는 1947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비교법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모교로 돌아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1983년부터 2년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법과대학원 객원연구원을 지낸 양 내정자는 1985년부터 한양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육사와 숭전대(현 숭실대)에서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헌법과 법사회학 강의를 해온 정통 학구파인 양 내정자는 순수한 헌법이론뿐만 아니라 법철학과 법사회학적 관점에서 헌법을 연구하는 등 국내 헌법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헌법학자, 행정법학자, 법조인들의 모임인 한국공법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7년 공법학회에서 학술상을, 2002년 한국법학원에서 법학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헌법연구> <입헌주의를 위한 변론> <미국헌법과 대외문제> <법사회학>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양 내정자는 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을 쌓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 외에도 다양하고도 폭넓은 대외활동을 해왔다. 그는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 한국공법학회장, 대검찰청 감찰위원회 부위원장, 통일부 정책평가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등을 맡으며 자신의 해박한 법지식을 우리사회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사회 각 분야에서 전공을 살려 왕성한 활동을 해온 그는 2008년 3월 출범한 국민권익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권익위는 기존의 국가청렴위원회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무총리실 소속 행정심판위원회 등 3개 기관이 합쳐진 것으로 권익위원장 재임시 양 내정자는 무려 1만 건이 넘는 행정부처의 행정규칙까지 검토하고 개선하도록 권고하는 등 부정부패 소지를 없애는 법령시스템을 정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업무능력과 관련, 일각에서는 당시 청와대 행정관의 성 접대와 경남지역 기관장들의 골프사건 등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음에도 권익위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의 호된 질책이 있었고, 이에 양 내정자가 책임을 지고 사퇴했을거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양 내정자는 “떠나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하면 보기 안 좋다”며 끝내 함구해 그의 사퇴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깊은 학식과 풍부한 대외활동 경력을 겸비했다는 것은 양 내정자가 갖고 있는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또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업무상으로도 추진력과 업무장악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 그가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것도 이러한 면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홍상표 청와대 정무수석은 “그간 학계와 시민단체, 행정부에서 헌법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전파하고 솔선수범해 온 경험과 외유내강의 리더십, 추진력과 업무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세평을 종합해볼 때 감사원장 적임자로 판단된다”고 밝힌 바 있다.
양 내정자는 법 분야에 대한 권위자답게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를 외면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왔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존폐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는 국보법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법 집행으로 인한 인권침해 소지가 컸으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국보법 자체의 고유한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양 내정자는 외유내강형 스타일로 전형적인 학자풍 인물이다. 학계에서는 평소 말수가 많진 않지만 올곧은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품, 학자 특유의 성실함과 청렴함으로 주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색이 없다는 것과 도덕적으로 눈에 띄는 하자가 없다는 점도 양 내정자의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 대통령이 고심 끝에 양 내정자를 낙점한 것은 올 1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정동기 전 후보자가 전관예우 논란과 당청 간의 갈등으로 사퇴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전관예우 구설 및 정치적인 시비거리에 휘말릴 염려가 없는 정통 학계 출신 인사를 내정한 것은 정 전 후보자로 겪은 쓴 경험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말이 많은 집권 후반기에 정권과 가까운 인물을 권력의 핵심포스트로 꼽히는 감사원장 자리에 앉혔다가 생길 수 있는 구설 또는 마찰을 피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양 내정자는 이명박 정부에서 논란을 빚었던 일명 고소영 라인(고려대-소망교회-영남출신)에서 벗어난 인물로 도덕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평이다. 종교는 천주교로 부인 이명숙 씨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육군 대위로 만기 전역해 군대문제도 꼬투리를 잡힐 일이 없다.
하지만 정식임명까지 양 내정자의 앞날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가장 먼저 양 내정자 역시 만만찮은 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 청문회를 통과하기에는 무리가 없어보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양 내정자는 자신을 둘러싼 몇 가지 의혹들에 대해 해명하고 야당의 신랄한 공격을 정면돌파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앞으로 열리게 될 양 내정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보은인사 논란 및 부동산 문제, 논문 시비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권익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3월 관보에 게재된 재산내역에 따르면 양 내정자는 본인과 직계 존·비속의 재산이 총 17억9872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대부분은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12억 9600만 원)와 모친이 소유한 서울 용산동 이촌동 아파트(3억 8900만 원)가 차지한다. 일단 양 내정자는 대치동 아파트에 1984년부터 27년 동안 계속 거주해온 것으로 알려져 아파트 투기 의혹에 휘말릴 가능성은 없다. 논란이 될 부분은 배우자가 소유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의 867㎡(262평)짜리 임야다. 시가로 따져봤을 때는 그다지 높은 금액이 아니지만 양 내정자의 부인이 가족과 아무 연고도 없는 원주의 임야를 지난 2005년 8500만 원을 투자해 지인 등 50명과 함께 매입한 것에 대해 투기의혹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양 내정자는 “정년을 앞두고 은퇴 후 전원주택을 짓고 살려고 산 땅”이라며 “오히려 시세보다 높은 땅값을 지불했다”며 투기의혹을 부인한 바 있다. 청와대 역시 “구입 당시 ㎡당 10만 원대인 땅 값이 5만 원대 밑으로 떨어져 현재 4000만 원대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투기의혹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그러나 아직 전원주택을 짓지 않은 데다가 전원주택용으로 구입한 땅치고는 규모가 크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논문 시비도 양 후보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은 정통학자 출신인 만큼 논문과 관련된 구설은 양 내정자에게 있어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양 내정자 측은 1990년대 학계의 관행이었던 주석을 달지 않고 자기 논문을 재인용한 사례가 몇 개 있었음을 인정했다.
야당은 ‘회전문 인사’ ‘땡큐인사’ 논란을 집중적으로 문제삼을 것으로 보인다. 양 내정자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첫 권익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라는 점, 지난 2009년 8월 27일 3년 임기의 권익위원장 임기를 반도 채우지 않고 중도사퇴한 것과 관련, 이재오 전 의원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여권 일각에서는 “이 전 의원을 위해 길을 열어준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이에 대해 양 내정자는 “재임기간 신설 기관 토대는 만들었다. 마침 전면적인 내각 개편 움직임이 있어서 국정쇄신에 일조한다는 취지에서 사임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야권은 이번 감사원장 인사는 이재오 특임장관에게 밀려난 양 내정자에 대한 ‘보은’ 차원의 인사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맹공격에 나설 태세다.
양 후보자는 내정 직후 뭇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감사원 업무의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을 재차 강조했다.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양 내정자가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지 여부다. 양 내정자가 정식 임명돼 5개월에 걸친 감사원장 공백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