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딸” “대통령딸” 갈수록 태산
▲ 영화 <범죄의 재구성>의 한 장면. |
경찰조사 내내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던 권 아무개 씨(29)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후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살아왔던 권 씨는 하버드 의대생이자 재벌그룹의 딸로 행세한 후 결혼을 빙자해 남성들로부터 2억 원 이상의 돈을 편취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계속되는 추궁에도 끝내 권 씨가 혐의를 부인하자 경찰은 결국 대질심문을 할 수밖에 없어 피해자들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다. 그때서야 권 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모든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자세한 내막을 털어 놨다. 피해 남성들을 감쪽같이 속인 권 씨의 뻔뻔한 혼인빙자 사기사건 속으로 들어가 봤다.
“오빠 나 사실은 ○○그룹 회장 딸이야. 저기 밖에 보이는 사람들 있지. 사실은 내 경호원들이야….”
진 아무개 씨(남·당시 29)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평범한 여대생으로 알고 교제를 해왔던 권 씨가 만난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자신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딸이라고 밝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 씨는 일찌감치 미국 명문 사립 하버드대에서 의대 학부 과정을 졸업하고 뉴욕의대 전문 대학원에서 내과 전문의 과정까지 수료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진 씨는 반신반의했지만 곧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데이트 때부터 권 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경호원, 개인 비서와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다. 권 씨는 “그동안 속이느라 마음이 불편했다”며 개인비서에게 진 씨를 소개하기도 했다. 갑작스레 해외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권 씨는 유창한 영어실력을 자랑하듯 장시간 진 씨 앞에서 통화를 했다.
정작 진 씨는 대학 졸업 후 별다른 경제활동 없이 구직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 비해 세련된 차림과 교양 있는 말투의 재력가 권 씨는 더욱 신비하게 보였고, 두 사람의 관계도 결혼을 약속할 만큼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권 씨는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가고 싶은데 안전 문제 때문에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몰래 가고 싶다”며 진 씨에게 비행기 표 250만 원을 대신 결제해 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 진 씨는 결혼할 배우자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 간청하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비행기 값을 대신 내줬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돌아와야 할 권 씨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진 씨는 걱정스런 마음에 애타게 연락을 기다렸고 며칠 후 권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의료 봉사를 무사히 마친 후 학업 문제로 미국에 들렀는데 몸이 너무 허약해져 병원에 가야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부모님이 분명 걱정하실 테고 봉사를 떠난 것도 알게 되실 테니 병원비를 대신 내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 병원에 간 후에는 다시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다며 수술비 300만 원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흐느끼기도 했다.
비행기 표에다 수술비까지 경제적인 여유가 없던 진 씨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부모님께 말씀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왜 그 정도 재력이 있으면서 자꾸 나에게 부탁하느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 씨는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딸이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라실 것이다”며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고 애걸복걸했다.
해외에 있는 여자친구가 꿋꿋이 시련을 이겨내려 한다는 생각에 진 씨는 도와주기로 하고 지인들까지 동원해 그가 요구하는 금액을 송금했다. 권 씨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진 씨는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부모님을 함께 만나자고 했다. 권 씨는 흔쾌히 진 씨와 동행해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때문에 진 씨는 권 씨를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권 씨 역시 “결혼을 한 후 의사가 돼 모든 돈을 갚겠다”며 “우선 부모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진 씨 역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권 씨가 요구하는 돈은 갈수록 늘어났고, 한 회에 20만 원에서부터 50만 원까지 150여 차례에 걸쳐 진 씨뿐 아니라 그의 부모님의 돈까지 빌려 썼다.
그러나 행복은 권 씨에게 빌려 준 돈이 2억 원이 넘어가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진 씨가 그동안 돈을 빌린 사람들에게서 빚 독촉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권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그동안 빌려준 돈을 갚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권 씨는 웬일인지 그때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진 씨는 그때서야 자신이 그동안 그의 말만 믿었을 뿐 아무것도 눈으로 확인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 씨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진 씨는 하버드 의대 졸업장을 보여줄 수 없겠냐고 요구했다. 진 씨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자 그때부터 권 씨는 아예 연락을 끊어 버렸다.
홀로 남은 진 씨는 그때까지도 권 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의심하자 연인이 상처를 받아 떠난 것은 아닐까 싶어 깊은 후회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2억 원의 빚 독촉은 진 씨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는 권 씨를 어떻게든 만나 설득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다. 진 씨는 “재벌그룹 회장 딸이 돈을 빌려 간 후 연락을 끊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그런데 경찰조사가 진행되면서부터 진 씨는 자신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꽃뱀에게 지난 6년간 농락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권 씨는 중학교 졸업 후 화류계로 진출해 서울 고급룸살롱에서 마담으로 일하고 있는 유흥가의 ‘꽃’이었다.
결국 진 씨는 권 씨를 혼인빙자 사기 혐의로 부산사상경찰서에 고소했다. 권 씨는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다 돌연 잠적했고, 지난 2월 17일 불심검문에서 덜미를 잡혔다. 그러나 권 씨는 진 씨가 자발적으로 송금한 것일 뿐 자신이 재력가라 속인 것에 대해서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곧이어 권 씨에게 당한 또 한 명의 남성이 나타났다. 최 아무개 씨(32)는 50여 차례에 걸쳐 모두 4000만 원을 빌려줬다가 변제받지 못했다며 권 씨를 고소했다. 명문 의대에 다니는 것처럼 속여 결혼 후 빌린 금액을 모두 갚겠다고 약속한 점 등 범죄수법 역시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최 씨에게는 “사실 나는 대통령의 숨겨둔 딸이다”고 속인 점이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완강히 버티던 권 씨의 태도는 “이러면 고소인들을 불러 대질심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경찰의 말과 함께 무너졌다. 권 씨는 눈물로 속죄하며 그동안 두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즐기고 나머지는 사치품을 사는 데 모두 탕진했다고 털어놨다.
부산사상경찰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권 씨는 평소에 자신이 재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싶어 했다”며 “그동안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면 무시당할 것 같아 피해 남성들을 꼬드겨 명품의류를 구입하고 가짜 재력가 행세를 계속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