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선수서 배우로 전향 악·깡·힘 도움돼…슬럼프 때 만난 ‘기생충’ 봉준호 잊지 못할 은인
작은 얼굴에 꽉 들어찬 이목구비, 특히 커다란 두 눈이 인상적인 배우 정지소(22)는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에 대한 주변 반응을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갓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한 정지소에겐 여전히 10대의 풋풋함이 남아있었다. 데뷔 7년 만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릴 때에도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여고생의 역할로 기억됐었다. 그런 그가 같은 여고생의 역할이지만, 누구보다 깊은 어둠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잔뜩 가시를 세운 ‘방법사’ 백소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산행' 연상호 작가의 첫 TV 드라마 ‘방법’의 스핀오프, ‘방법: 재차의’의 이야기다.
“드라마에서는 소진이가 말도 틱틱 거리고, 약간 삐딱하면서도 시크한 눈빛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좀 더 인간다워진 모습과, 말투에서도 더 어른스러운 게 담긴 것 같아요. 특히 자기 이야기를 술술 말하는 부분에서 이전보다 더 어른스러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확실히 성장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액션 신에 중점을 두고 운동도 많이 하고, 액션스쿨도 다녔어요. PT도 받고요(웃음). 제 스스로도 체중 감량까지 되면서 캐릭터와 함께 체력적으로도 성장한 것 같아요.”
극 중 정지소가 맡은 백소진은 특정 대상의 한자 이름, 사진, 소지품만으로 저주의 살을 날릴 수 있는 ‘방법사’다. 우리 무속 신앙에서 방법이란 다른 사람에게 재앙을 내려 줄 것을 신에게 부탁하는 저주의 술법을 말한다. 원작인 드라마에서는 그의 어두운 면이 강조됐었지만 3년 뒤의 미래를 그린 ‘방법: 재차의’에서는 좀 더 성숙해지고 인간다워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특히 이번 작품에선 액션 연기까지 가미돼 백소진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배우 정지소로서도 이전보다 더 확장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제가 운동선수를 했다 보니 근육 쓰는 법을 아직까지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거든요(웃음). 그래서 액션을 소화할 때 좀 더 수월했던 것 같아요. 또 액션할 때 포즈, 그런 것도 중점을 두고 연습했어요(웃음). 이번 작품에서는 소진이의 그 멋있는 모습,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연기할 때 뭔가 심오하고 멋진 영화 OST나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저는 연기에 앞서 캐릭터를 준비할 때도 그 캐릭터에 어울리는 음악을 가장 먼저 찾거든요.”
그가 말한 대로, 정지소의 배우 이전의 모습은 피겨 선수였다. 2012년까지 본명인 ‘현승민’으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같은 해 배우로 진로를 바꾼 뒤 MBC 드라마 ‘메이퀸’으로 연기자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데뷔작에서도 능숙하게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신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피겨 선수에서 배우로 전향했어요.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고요. 오히려 ‘드디어 내가 TV에 나온다!’ 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웃음). 피겨를 할 땐 시간이 있어도 레슨 가기 싫어했어요. 제겐 연기의 꿈이 더 컸거든요. 그렇게 전향한 것에는 힘든 것보단 도움이 되는 게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정신력이나 악, 버티는 힘, 체력 등이 특히 그래요. 운동선수들은 훈련하다 힘들어도 스스로 이겨내야 하잖아요. 그런 게 배우 활동을 하며 도움이 많이 됐죠.”
드라마 ‘방법’에 이어 ‘방법: 재차의’에서도 호흡을 맞춘 배우 엄지원에 대한 애정도 여전했다.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님”이라며 드라마 때부터 열렬한 사랑 고백을 이어왔던 정지소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한 팬심을 드러내며 엄지원에 대한 칭찬을 이어나갔다.
“드라마에서 처음 뵀을 땐 말 거는 것도 엄청 어렵고, 상의 드리고 싶은 것도 있는데 (엄지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만큼 많이 쑥스럽더라고요(웃음). 또 대선배님이시다 보니 제가 먼저 많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소통도 잘 못했던 게 참 아쉬웠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첫 촬영 현장에 갔을 때 선배님이 신나게, 반갑게 맞아주시는 거예요(웃음). 그러면서 제게 더 많이 말을 걸어주시기도 하시고…. ‘그냥 어린 아이가 아닌 같이 작업을 하는 한 명의 배우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대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고 제 생각도 물어주시고 많은 소통과 많은 이해를 하며 더 좋은 장면을 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정지소가 느낀 감동은 이처럼 자신을 단순한 아역 배우가 아니라 어엿한 성인 배우로 대해 준 것에서 시작했다. 2012년 이후 아역과 비중이 적은 조연을 맡으며 조금씩 필모그래피를 쌓던 중, 어릴 때부터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배우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역시 슬럼프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2016년부터 약 3년 가까이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내게 맞는 길인지”에 대한 고민이 한 차례 자신을 휘감았다고 했다. 그렇게 연기자 생활을 포기할 기로에 놓였던 정지소에게 마치 운명처럼 동아줄 수준을 넘어선 ‘엘리베이터’가 다가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다.
“‘기생충’은 제게 정말 큰 영향을 준 작품이고, 현재까지도 주고 있어요. 만일 그 작품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연기를 계속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만큼요. 또 ‘기생충’이 없었다면 소진이를 포함해서 ‘기생충’ 이후 제게 주어졌던 역할들이, 그 기회가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제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이죠. 어떤 응원의 말보다도 봉준호 감독님이 제가 작품에 들어가는 소식을 알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제게 큰 힘이 됐어요. 봉준호 감독님은 제게 있어서 제가 다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정말 은인 같은 분이시죠.”
‘기생충’ 이전에 잠시 방황했던 그 시간이 순간적으로는 아팠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아픔보단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 시간을 헤쳐 나갔기 때문에 아픔도 잘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같은 경험을 겪을 후배들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배우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어요. 처음 접하는 일들을 해 보면서 배워나가는 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슬럼프가 극복됐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이후엔, 연기에 대한 마음이 좀 더 간절해졌어요. 연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해서 그런 친구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 또 인간 정지소로서도 가족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고 어디 내놔도 걱정 없을 만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