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석수 전 INI스틸 사장 | ||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INI스틸(옛 인천제철)을 두고 요즘 안팎에서 말들이 많다. 지난 연말 이 회사의 대표이사가 전격 교체됐기 때문이다.
매년 연말시즌이 되면 국내 대기업에서는 임원 승진, 교체 등이 빈번히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INI스틸의 ‘인사’가 업계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딱히 대표이사가 바뀔 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INI스틸은 지난해 오히려 사상최대의 실적을 기대하며 사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분위기였다. 전직원들이 연말 보너스를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사이에 대표이사가 교체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 더군다나 이번 대표이사의 교체가 현대차그룹이 철강 사업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돼있다는 얘기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일까.
지난해 12월27일 INI스틸은 정석수 대표이사 사장이 현대파워텍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경북 김천 출신인 정 사장은 지난 98년 현대하이스코의 전신인 현대강관 관리본부장을 맡으며 현대그룹에서 입지를 넓혀온 사람이다. 그의 직장 경력의 대부분은 철강회사의 재무파트였고, 지난 2002년 현대차가 당시 인천제철(현 INI스틸)을 인수하자 현대하이스코에서 INI스틸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INI스틸로 발령받은 지난 2002년 1월 그의 직함은 부사장이었고, 불과 두 달 뒤에 그는 ‘대표이사’ 부사장이 됐다. 한마디로 철강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전공도 부전공도 아닌 자동차부품회사(현대파워텍)의 전문경영인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은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할만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쟁사의 동향 등을 체크하지만 정 사장의 교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로 미뤄보자면 이번 인사는 그만큼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조치라는 얘기다.
정 사장이 철강회사 이외의 곳에서 근무했던 적은 지난 2003년 1년이 고작이었다. 그는 지난 2003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정 사장은 그룹 안에서 대표적인 재무 인사 중 한 명으로 카드사가 위기에 처하자 구원 투수격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얘기가 파다했다고 한다.
그가 1년 2개월 만에 친정인 INI스틸로 돌아왔을 때도 그랬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은 큰 숙제를 떠안고 있었다. 바로 한보그룹의 주력사인 한보철강의 인수였다. 현대차는 현대하이스코-INI스틸 컨소시엄을 구성해 한보철강을 낙찰받았으나, 실제로 인수를 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 사장이 그룹 오너 간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정 사장이 오너로부터 한보철강 인수작업을 매끄럽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 때가 바로 지난해 6월이었다. INI스틸 관계자에 따르면 정 사장은 다시 친정(INI스틸)으로 돌아온 이후 한보철강 인수를 위한 프로젝트팀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연말 현대차는 한보철강의 인수를 마치고, 철강산업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됐다.
한국철강협회에서 선정한 지난해 최대 철강 뉴스는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의 한보철강 인수’였다. 곧 현대차그룹이 철강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시점에서 한보철강 인수의 중심축을 형성했던 정 사장이 다른 계열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한보철강 인수가 잘 끝났기 때문에 다른 계열사로 자리를 옮긴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는 분위기다. INI스틸 컨소시엄이 한보철강 인수를 끝마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의 역할은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이 시점에서 자리를 옮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의견 때문이다. 결국 그의 전보 발령에는 오너와의 불화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가 조심스럽게 흘러 나오고 있다.
그가 재무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오너와의 불화가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은 자금부분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한보철강의 인수대금은 이미 정해진 것이니 문제가 될 것이 없고, 결국 향후에 투입되는 자금 규모를 두고 이견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시각이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이 철강사업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향후 막대한 금액을 지출해야 한다.
현재 현대차그룹의 철강 계열사는 현대하이스코(옛 현대강관), INI스틸(옛 인천제철), BNG스틸(옛 삼미특수강) 등 세 군데.
이 중에서 현대하이스코는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생산하는 업체고, INI스틸은 전기로 제강회사다. BNG스틸은 INI스틸의 자회사로 스테인리스 냉연강판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현대하이스코와 BNG스틸의 제품은 대부분이 자동차용 부품으로 사용되지만, INI스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향후 포스코와 경쟁해야하는 본격적 철강회사인 셈이다.
정몽구 회장은 이 회사에 대해 애착이 각별하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실제로 그는 INI컨소시엄을 앞세워 한보철강에 과감하게 뛰어들 정도로 철강업에 열정을 보였고, 또 지난해 11월에는 한보철강 공장을 방문해 “일관제철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제철사업에 꼭 필요한 고로에 대해 “반드시 짓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정 회장의 의중대로라면 현대자동차는 향후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강판은 물론, 제철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문제는 소요되는 자금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한보철강 내에 고로를 건설하고, 또 회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수조원대의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INI스틸이 지난해 사상 최초로 매출 5조원 시대를 열며 승승장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 인수한 회사에 수조원의 자금을 퍼부을 여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상황이다. 철강회사의 자금부만을 담당해온 정 사장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는 얘기도 추측 가능하다.
INI스틸은 향후 회사 경영은 기아자동차 출신의 김무일 대표이사 부회장이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 사장의 전보 이유에 대해서는 인사권자만이 정확히 알고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회사 경영실적을 사상최대로 만들어놓고도 전보된 경영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