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문제로 번지면서 조심스러운 분위기…LS “강제동원 피해자 아픔 충분히 공감”
#압류한 채권은 누구의 것인가?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은 지난 8월 12일 미쓰비씨중공업이 LS엠트론으로부터 받을 물품대금 채권 약 8억 5000만 원에 대해 압류 및 추심명령 결정을 내렸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채권 압류를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앞서 2018년 11월, 대법원은 미쓰비시에 강제동원 피해자 1인당 8000만~1억 5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미쓰비시는 배상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LS엠트론의 2018년 사업보고서와 (주)LS의 2020년 사업보고서는 LS엠트론의 트랙터 엔진 부품 주요 매입처로 미쓰비시중공업을 명시했다. 미쓰비시와의 구체적인 거래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LS엠트론이 지난해 445억 원을 트랙터 원재료 매입액으로 사용했다. 미쓰비시 측의 채권이 8억 5000만 원 이상일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런데 LS엠트론은 미쓰비시중공업이 아닌 그 자회사 ‘미쓰비시중공업엔진시스템’과 거래했다는 입장이다. 사명이 길어 축약해 공시를 올렸을 뿐이고, 공시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수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8월 20일에는 LS엠트론이 법원에 진술서를 제출하고 거래 관계를 소명했다. 이에 대해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LS엠트론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LS엠트론의 설명대로 미쓰비시중공업엔진시스템을 별개 법인으로 분류해 채권을 압류하지 못하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비시중공업이 100% 출자한 자회사가 정서적으로 다르게 보일까 싶다”라며 “법적으로 별개 회사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배상을 미루는 것이 기업에 득이 될 것 같지는 않다”라고 전했다.
미쓰비시 측의 채권이 압류되더라도 LS엠트론 입장에서는 어차피 지출 예정인 자산이기 때문에 회계상 추가적인 부담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체 법인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압류 결정을 따르면 미쓰비시중공업엔진시스템이 이를 문제 삼을 수 있다. 법원의 판단과 국내 여론, 거래 기업과의 관계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셈이다.
이와 관련, LS그룹 관계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고,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를 것”이라면서도 “미쓰비시중공업엔진시스템이 소송을 통해 대금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은 해당 채권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액에 해당한다는 법적인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법적인 판단에 따른다고 해도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법원 판결은 LS그룹과 미쓰비시를 넘어서 한일 양국 간 외교전으로 번지고 있다. LS그룹의 일본 법인 LS일렉트릭재팬, LS오토모티브재팬, LS케이블&시스템재팬 등은 모두 수백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 ‘니케이아시아’에 따르면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8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채권 압류는 한일관계를 매우 심각하게 만들 것”이라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한국에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악화된 한일관계, 기업들은 눈치보기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LS그룹뿐 아니라 대부분 기업에게 민감한 문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지난 5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제조업 부문 해외직접투자 순투자액은 2017~2018년 217억 달러(약 25조 3348억 원)에서 2019~2020년 279억 달러(약 32조 5733억 원)로 28.6%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본에 대한 직접투자는 1억 6800만 달러(약 1961억 원)에서 1억 2500만 달러(약 1459억 원)로 25.6% 감소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직접투자 규모도 2017~2018년 5786억 엔(약 6조 1520억 원)에서 2019~2020년 2194억 엔(약 2조 3328억 원)으로 62.1% 감소했다. 한경연은 양국의 투자가 줄어든 원인으로 2019년부터 악화된 한일관계를 꼽았다.
한경연은 한일 교역 위축에 따른 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결과 2019~2020년 생산유발액이 1조 2000억 원 감소했고, 취업유발인원도 1만 3300명 줄었다고 밝혔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지난해 코로나19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양국의 교역 위축은 유독 크게 나타나 정치·외교 분쟁이 경제 갈등으로 전이되는 양상”이라며 “악화된 한일관계가 양국 경제 모두에 피해를 주고 있는 만큼 한일 정부는 조속한 관계 정상화 노력으로 경제적 악영향을 차단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경제적 논리를 이유로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무마하면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 측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적도 없다. 비슷한 사례로 서울중앙지법원은 지난 6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 등 16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했다. 이에 대해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조선총독부 경성법원 소속 판사가 한 판결인지 의심이 갔다”라며 “이 잘못된 판결은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당연히 바로잡아지겠지만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국민적 분위기로 인해 경제계에서도 한일관계 개선을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LS엠트론이 미쓰비시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 한일 간 교역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다. 하지만 한국 기업인 LS엠트론이 미쓰비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도 없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에 의존하는 기업이 적지 않은데 일본과의 분위기가 나빠지면 국내 기업에 악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라며 “기업에는 영향이 없도록 국가에서 외교적인 노력을 해줬으면 한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입장을 내는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8월 19일 정례 브리핑에서 최근 논란에 대해 “관련 동향을 주시 중에 있다”고만 답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