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폭발하면 ‘지옥 문’ 열린다
▲ 대지진 5일 후인 3월 16일 위성에서 후쿠시마 원전을 찍은 사진. 당시 1·2·3호기가 모두 멜트다운 상태였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로이터/뉴시스 |
3월 11일 대지진 후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하루 평균 500톤의 물을 퍼부어 여태까지 사용된 물만 10만 톤을 넘어섰다. 두 달을 넘겼지만 원자로 냉각 정상화 등 사태 수습 자체가 요원하다. 최근에는 체르노빌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참사가 될 것이란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원자로 내 핵연료가 녹는 ‘멜트다운(Melt down·노심용융)’ 현상 때문이다. 도쿄전력은 1호기가 지진 발생 16시간 만에 거의 모든 핵연료가 녹았다고 뒤늦게 밝혔다. 또한 2호기는 101시간 만에, 3호기는 60시간 만에 연료봉이 녹았다고 인정했다. 도쿄전력 측은 2·3호기는 쓰나미가 밀려온 후 비상용 냉각장치가 가동돼 1호기에 비해 손상이 적어 6~9개월 정도로 예상한 사고 수습 일정에는 차질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제 정부와 도쿄전력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언론은 도쿄전력이 멜트다운을 은폐해온 사실을 비난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3개의 원자로가 동시에 녹는 트리플 멜트다운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최악의 사고”라며 극도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멜트다운이란 원자로 내 핵연료가 가열되거나 연료피복관이 찢어져 연료나 연료봉이 녹는 것을 말한다. 연료봉(노심)이 손상돼 원자로 안쪽 압력용기와 바깥쪽 격납용기에서 ‘죽음의 재, 악마의 재’로 불리는 플루토늄이 나오면 통상 ‘멜트다운 시작’으로 본다.
멜트다운이 진행돼 노심용해물이 물과 만나면 ‘수증기 폭발’을 하고, 핵분열이 다시 일어나는 ‘재임계’도 시작된다. 결국 방사성 물질이 외부에 엄청나게 확산되는 대량누출과 연료봉이 땅에 녹아 흘러들어 지표나 지하수 오염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지옥문이 열리는 셈이다. 이번 도쿄전력의 발표로 후쿠시마 원전 1, 2, 3호기가 지진 직후부터 멜트다운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새삼 드러나면서, 후쿠시마 인근 지하수의 대규모 오염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고이데 히로아키 교수는 “동시다발 멜트다운은 아무도 결과를 예측 못하는 사태”라고 지적한다. 즉 인류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상황이 언제 수습될지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도쿄전력은 “멜트다운이 진행됐으니 이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냉각수 투입 작업 대신 이미 투입된 방사성 오염수를 순환시켜 냉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며 ‘순환냉각’ 방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압력용기 안에 물이 차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순환냉각이 가능할지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교적 손상이 적다는 2, 3호기의 경우 만일 압력용기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면 물과 함께 핵연료가 떨어져 격납용기도 파손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순환냉각 방식은 어렵다.
원자로 설계 기술자들도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격납용기 압력억제실에서 수소가 폭발한 2호기는 방사성 물질 유출이 가장 심했고, 지난 5월 15일부터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성자를 흡수하는 붕산을 투입해온 3호기 역시 심상치 않다. 3호기의 압력용기는 온도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4월에는 110℃ 전후였던 것이 5월 초 200℃까지 오르고 5월 중순 경에는 297℃까지 올랐다. 따라서 급수 작업이 멈출 경우 수증기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녹은 핵연료가 용기에 찬 물과 만나면 급격히 증발해 폭발한다. 이 경우 세슘 등 방사성 물질이 바람을 타고 대량으로 확산된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다나카 미쓰히코씨는 지난 3월 3호기 폭발에서 검은 연기가 나온 점도 지적하고 있다. 연기가 일반적 수소폭발에서 보이는 하얀색과 달리 검은 이유는 3호기 폭발이 수소폭발이 아니라 격납용기 내 배관·배선이 다 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호기도 3월 대지진에 땅이 흔들리면서 배관이 충격을 받아 냉각수가 새어나와 원자로를 식힐 수 없었던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쓰나미나 지진으로 전원 공급 장치 전원이 끊겨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 보는 기존의 시각을 뒤집는 설이다. 다나카 씨는 실제 후쿠시마 원전 4호기 원자로 설계를 담당한 적도 있어 그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원자로가 식지 않으면 핵연료봉은 녹기 때문에 방사능 유출은 날로 더해질 것이다. 문제는 원자로 노심을 식히지 않는 한 체르노빌의 경우처럼 콘크리트로 덮을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벌써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방사능 오염이 시작됐다. 지난 4월 6일부터 29일까지 일본 문부과학성과 미국 에너지부는 700m 상공에서 방사성 물질 누적량을 공동으로 측정해 오염지도를 만들었는데, 방사성 물질 세슘의 누적 농도가 무려 60만 베크렐 이상인 면적이 후쿠시마 인근 약 800만㎡에 이른다. 도쿄의 23개 구나 서울 면적보다 넓다. 이런 고농도 오염지역은 후쿠시마 원전 반경 80㎞를 중심으로 북서쪽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고농도 오염지역이 약 1만㎢에 이르는 체르노빌과 비교할 때 10분의 1 정도 규모에 불과하니 아직은 그나마 괜찮은 것 아니냐”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이데 교수는 “앞으로 체르노빌 이상의 참사도 시간문제”라 강조한다. 이대로 간다면 공기에 노출이 많은 잎채소부터 시작해 언젠가는 원전과 먼 지역 지표면도 오염된다는 것이다. 일본 당국은 궁여지책으로 “토양의 방사성 물질이 체내에 들어올 일은 없다”고 했으나 체외 피폭도 위험한 수준이다. 이미 지난 4월 후쿠시마현 각 학교에는 운동장 수업을 자제하라는 문부과학성의 지침도 내려왔다. 아이들은 체구가 작아 성인에 비해 몸이 지표면에 닿는 거리가 훨씬 짧기 때문에 토양 오염에 더 위험하다.
지난 5월 13일에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무려 300㎞나 떨어진 가나가와현 차밭 찻잎과 도쿄의 4개 정수장에서 기준치를 넘는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 후쿠시마에 가까운 이바라기현보다 더 먼 곳에서 방사성 물질이 더 높게 검출됐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고이데 교수는 “기상 상태나 바람 방향에 따라 방사성 물질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거리에 따라 방사능 유출을 계산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또 대기 중에 있던 방사능 물질이 장마로 비와 함께 땅으로 떨어져 내리거나, 태풍이 발생할 경우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 어디로 갈지 모르니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럼 한반도는 어떨까? 기상청에서는 북반구 중위도 3~12㎞ 상공에서 바람이 서에서 동으로 부는 편서풍 때문에 방사성 물질의 우리나라 유입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편서풍’ 때문에 그간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진 서일본 지역 각지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