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통도 안 바뀌는데” 폭력의 대물림과 은폐하는 구조 비판…한준희 감독 “대사를 주목해 달라”
군대에 다녀 온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불러일으킨다는 이 작품에 대해 연출을 맡은 한준희 감독은 “대사를 주목해달라”고 주문한다. 숱한 대사 속에서 군내 가혹행위가 거듭되는 이유, 그리고 이를 바꿔 보고 싶은 연출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D.P.’ 속 주요 대사를 통해 군내 가혹행위의 현실, 그리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짚어 봤다(※기사에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조석봉 일병에게 납치당한 황장수 병장은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라는 조 일병의 질문에 겁에 질린 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고 답한다. 황 병장은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이에 대해 적잖은 네티즌은 ‘폭력의 대물림’이라고 입을 모은다.
군내 가혹행위는 한국에서 군대가 창설된 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다. 선임병이 후임병을 괴롭히고, 그 후임병은 계급이 올라간 후에 또 다시 후임병을 괴롭힌다. ‘D.P.’의 주인공인 안준호 이병을 향해 “우린 후임들한테 잘해주자”던 조 일병조차 거듭된 가혹행위 속에 그 역시 폭행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조 일병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던 인물이다. 전역식을 치르고 위병소를 빠져나가려는 황 병장에게 “사과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황 병장이 끝까지 “미안하다, 미안해∼”라고 건성으로 답하는 모습을 접하며 내적 분노를 외적 행동으로 분출시킨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황 병장에게는 사실상 죄의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진정 어린 사과 역시 나올 수 없었던 셈이고, 조 일병은 군 시스템으로 엄단하지 못하는 황 병장을 향한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어떻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나요?”
‘D.P.’에서 코골이가 심하다는 이유로 잘 때 방독면을 씌우고 그 속에 물을 들이붓는 가혹행위를 당하던 끝에 탈영을 결심한 병사는 결국 군무이탈체포조에게 붙잡혀 부대로 복귀한다. 이제 괜찮다고 탈영한 아들을 다독이는 엄마에게 이 병사는 “엄마 바보야? 우리나라 그런 나라 아니야. 나 방독면 씌운 애들 전출 간대. 다른 부대로 간다고. 걔네가 전과자 되고 뭐 영창에 가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데로 간다고”라고 외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간부들을 향해 “얘 말이 진짜예요? 그럼 재판을 안 열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나라를 지키라고 보낸 군대에서 애를 때리고 괴롭혀서, 그래서 탈영을 했던 건데, 어떻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나요?”라고 절규한다.
모든 가혹행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적발됐을 때 이를 수습하는 이들이 있다. 통상 간부들의 몫이다. 하지만 ‘D.P.’ 속 몇몇 간부들은 진급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쉬쉬하는 모습을 보인다. 분명 문제는 발생했는데, 이를 책임지고 마무리하려는 이들이 없기에 군내 가혹행위의 악순환은 반복되고 있다고 ‘D.P.’는 외친다.
#“군대 안 왔으면 탈영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요?”
군무이탈체포조로 차출된 안준호 이병에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탈영한 신우석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가 묵고 있는 모텔 위치도 확보된 상황이라 가서 잡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수월한 임무였다. 하지만 안준호는 자살하는 신우석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그가 자신에게 라이터를 빌려 불을 붙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이 일로 선임병을 폭행하고 영창에 가 있던 안준호는 D.P. 담당관인 박범구에게 “신우석, 군대 안 왔으면 탈영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요?”라고 묻는다.
‘국방의 의무’는 대한민국 남성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다. 피할 수 없고, 고의로 회피하려다가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작 ‘원해서’ 군대에 가는 이는 몇이나 될까. 원치 않는 곳에 가서, 생판 모르는 이들과 관계를 맺고, 게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가혹행위까지 받게 되니 탈영을 결심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박범구 중사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맞는 말이다. 군대에 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의무인 상황 속에서,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자조다. 대한민국 군대의 속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납치한 황장수 병장을 죽이려는 조석봉 일병을 향해 한호열 상병은 “(군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만류한다. 그 때 조 일병은 이렇게 답한다. “거기(수통)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1954,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이 장면이 포함된 ‘D.P.’ 6부의 제목은 ‘방관자들’이다. 군내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안다. 하지만 각자의 이유로 이를 묵인한다. 병사들의 경우 군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기에 의무 복무 기간만 채우고 전역하면 그만일 뿐, 굳이 이를 바꾸기 위해 나서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몇몇 간부들 역시 그런 병사들의 속내를 알기에 최대한 조용히 지내다가 전역하면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된다’는 식으로 다룬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구조적 모순 속에 군대 문화는 바뀌기 어렵다고 한준희 감독은 목소리를 낸다.
한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군내 가혹행위를 누군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분명히 짚고 싶었다. ‘방관자들’이라는 제목은 교훈을 주기보다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바꾸려 한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