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 한 번은 다 봤다”
북한 내 한류의 본격적인 행보는 지난 94년 김일성 위원장의 사망 후 쌀이 없어 아사자가 속출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라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국에서 불법 CD를 수입하는 밀수꾼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 지난해 7월 탈북해 서울에 정착한 김 아무개 씨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중국 밀수꾼을 통해 북한 약초를 넘기는 대신 한국 드라마, 영화 CD를 들여왔다”며 “그 당시 밀수가 발각되면 강제노동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사형당했다”고 전했다. 이 시절 북한 주민들의 남한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한 것도 한몫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을 알고 싶어 했다”며 “그렇게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해 차츰 남한 드라마에 매료돼 갔다”고 말했다.
‘북한 내 한류의 전성기’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김 씨는 “2003년 이후부터는 처벌과 감시도 매우 약해져 아예 문을 열어 놓고 한국 드라마를 볼 정도였다”고 전한다. 북한 간부 출신인 전 아무개 씨도 “90년대엔 남한 제품 상표를 다 뜯어내고 팔았지만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이러한 통제가 없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한류에 대한 통제가 대폭 강화되었다. 김 씨는 “최근에는 밀수입 검거뿐만 아니라 남한 CD에 대한 감시도 강화됐다”며 “현재 북한 평민들이 볼 수 있는 드라마의 양이 많이 줄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강화된 북한 정부의 감시와 통제에도 ‘보는 사람은 본다’가 취재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지난해 6월에 탈북한 최 아무개 씨는 “보던 사람은 안 보면 못 견딘다”며 “그 감시 속에서도 회사 동료뿐만 아니라 사장도 안보는 것처럼 해도 다 봤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북한 주민들이 한류를 접하고 있는 것일까. ‘북한 주민 몇 퍼센트가 한류를 접했다고 보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취재 과정에서 만난 탈북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북한 사람 100%가 최소한 한 번씩 다 봤다’고 답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일부 내륙지방이나 농촌에선 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고 답한다. 결국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 한류를 접하고 있다는 것. 특히 북한 내 상류층은 무조건 100% 다 봤을 것이라는 게 탈북자 6명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북한 간부 출신 탈북자 전 아무개 씨는 “북한에 있던 시절 남한 영화와 드라마를 엄청 봤는데 보통 남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봤다”고 말할 정도다. 북한 정치의 중심 평양에서 거주했던 김 씨는 “평양은 외부접촉이 용이해 지방보다 평양사람들이 더 잘 본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북한 평민들은 12볼트 자동차 배터리로 볼 수 있는 작은 텔레비전에 CD를 꼽아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한다. 전 씨는 “북한 사람들은 일 끝나면 저녁 때 할 것이 없어 작은 텔레비전으로 친구 가족들 모두 모여서 한국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본다”며 “CD를 돌려가면서 보기 때문에 순서를 놓치면 다시 몇 달 동안 기다려야 해 한 번 받으면 밤새서라도 다 보려 한다”고 말 했다.
중국 무역상 출신인 최 아무개 씨는 직접 텔레비전을 통해 한류를 접했다. 중국에서 구입한 리모컨으로 KBS1 채널을 꾸준히 시청한 것. 그는 한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KBS 9시 뉴스>를 시청할 정도로 한국 TV를 애청했다. 최 씨는 “집에서 쓰는 막대기(리모컨의 북한말)가 두 개였는데 인민반장이 문을 두드리면 한국방송 시청용 막대기는 숨겼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이 가장 열렬하게 사랑했던 한국 드라마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취재원이 가장 인기 있었던 한국 드라마로 <대장금>을 꼽았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홍 아무개 씨는 “내가 <대장금>을 봤을 때 한국에서도 방영되고 있었다”며 북한에서 한류 드라마가 생각보다 빠르게 유통되고 있다고 전했다.
전 씨 또한 “<대장금>이 중국에서도 히트를 치면서 북한에서도 덩달아 인기였다”며 “<대장금> 열풍에 힘입어 이영애도 인기가 높다”라고 말했다. 이영애 외에도 한지혜 신현준 최지우 장나라 등의 연예인이 북한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편 40~50대 장년층이 공통적으로 꼽는 드라마는 <남자의 향기>다. 전 씨는 “중장년층에서는 <남자의 향기>를 아무데서나 찾았다”며 “드라마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드라마 내용도 매우 재미있었다”고 답했다. 그 밖에도 <겨울연가> <가을동화> <낭랑 18세> <천국의 계단> 등의 드라마도 북한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중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시크릿 가든>은 어떨까. 홍 씨는 “<시크릿 가든>의 경우 지금쯤 상류층 자제들이 보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아직 일반 서민들은 보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한국 드라마가 북한 내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남한 헤어스타일과 패션 또한 유행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청바지는 단속이 심해 길거리에서 함부로 입고 다닐 수 없다. 그렇지만 탈북 대학생 이 아무개 씨는 “청바지 단속이 있긴 했지만 10대들은 그냥 입고 다녔다”며 “<겨울연가>의 최지우 단발머리와 칼머리가 북한에서도 은근히 유행했었다”고 전한다.
한류음악 또한 예외가 아니다. MP3 파일이 담긴 CD가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 것.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송대관과 설운도가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10대 젊은이들은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다고. 홍 씨는 “최근에는 소녀시대와 같은 최신 인기 아이돌 가수 노래가 압록강, 두만강 지역을 통해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기쁨조 같은 북한 가수들이 남한 섹시 여가수들을 모방한 뮤직비디오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1박 2일’, <무한도전> 등 한국 대표 예능 프로그램 CD도 북한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 몇몇 매체의 보도가 화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홍 씨는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봤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못봤다”며 “<무한도전>,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북한에서 통할지 의문이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넘었지만 난 아직 한국 예능프로그램 속 개그코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정아 기자 cja8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