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가 대한노인복지회 분당구지회를 방문하는 등 한나라당 지지층인 고연령층 유세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4일, 분당 을에 출마한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는 아침 6시 반부터 출근길 인사를 시작으로 하루 종일 거리유세 일정이 빠듯하게 짜여 있는 상태였다. 옷차림은 깔끔한 양복 정장이었으나, 치열한 유세를 위해 구두가 아닌 편한 캐주얼화를 신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났다”는 강 후보에게 “선거전은 체력전이기도 한데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걷는 거 이게 다 운동”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이날 하루 강 후보의 곁을 따라다녀 보았더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곁에 있던 측근은 “중학교 때 배구선수 출신이라 체력은 타고 났다”고 전했다.
첫날 유세 일정을 살펴보았더니 강재섭 후보가 주력하고 있는 대상은 역시 한나라당의 지지층인 고연령층인 듯했다. 같은 날 첫 일정으로 게임업체인 ‘네오위즈’ 본사에 들러 젊은 층을 대상으로 유세를 펼친 민주당 손학규 후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날 강 후보는 대한노인복지회 분당구지회를 들러 인사를 건넸고, 오후에도 노인정 등을 순방하며 주택가를 쉴 새 없이 돌았다. 다음 날인 15일에도 분당 정자동과 분당동 두 곳의 노인회 야유회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궁내동 노인정 총회에 참석하는 일정이 포함돼 있었다. 거리 유세 중 만난 한 할아버지는 “이곳 노인들은 모두 강 후보를 지지하고 있으니 강 후보한테 젊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라고 말해 달라”며 기자에게 강 후보에 대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이날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오후 12시 정자역에서 열린 공식 출범식을 겸한 첫 거리유세였다. 가히 ‘여당 대표’ 출신이라는 직함과 위치가 느껴질 만한 자리였다. ‘나 홀로 유세’를 펼치고 있는 손학규 후보와는 달리, 한나라당에서는 현역 의원들만 50명 이상 참석해 대대적인 세 과시를 했다. 마치 의원총회를 방불케 할 정도의 장면이었다. 광장에는 의원들과 당직자들, 지지자들이 모두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의원들은 악수를 나누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나경원 최고위원과 홍준표 최고위원은 직접 유세단상에 올라서 강 후보에 대한 지지연설을 했다.
그동안 분당 을의 강재섭 후보 출마를 두고 나 최고위원은 ‘지지’를, 홍 최고위원은 ‘반대’ 입장을 보여왔던 터였기에 특히 홍 최고위원의 지원사격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홍 최고위원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노래를 부르며 현장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홍 최고위원은 “손학규를 잡을 사람은 강재섭뿐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에 했다”며 “임태희 같은 걸출한 인물을 대통령실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지 않느냐. 그를 대신하고 그보다 더 나은 인물인 강재섭을 우리가 추천한 것”이라며 그동안의 입장에서 돌아서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도 했다.
‘머리 좋은’ 홍 최고위원은 유세 연설 중 박근혜 전 대표를 적절히 ‘파는’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 당시에 박근혜 전 대표를 그 지역으로 영입하신 분이 강 (전) 대표다. 처음엔 박 전 대표가 자기 ‘꼬붕’(아랫사람)이 될 줄 알고 영입했는데 하고 나서 보니 자기보다 더 큰 인물이 됐다. 그렇게 자기 기반 지역을 내주고 이 지역에서 다시 정치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 오셨다.”
잠시 뒤, 거리 유세 중 강재섭 후보의 곁에 다가가 “홍 최고위원의 지원이 힘이 되겠다”는 말을 건넸더니 그는 “그동안 이미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며 더 깊숙한 질문에는 손사래를 친다. 자신의 출마를 반대했던 홍 최고위원과 이미 충분한 교감을 나눴다는 뉘앙스다.
홍 최고위원에 이어 단상에 올라선 강 후보는 경쟁상대인 손학규 후보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마침 강 후보의 유세차량 옆에 휘날리던 손학규 후보의 플래카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강 후보는 “나는 이번 선거를 조용히 치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날아와서는 판이 커지고 갑자기 빅 매치가 되었다. 좋다. 난 누구든 와라, 붙어주겠다는 각오다. 왕년에 대표 안 해 본 사람 있느냐… 난 내 명함에 한나라당을 크게 써가지고 다니는데, 그 분은 한 번도 노란옷(민주당의 상징색)을 입은 것도 못 봤고 명함에는 당명도 모기만 하게 써있더라. 그러면서 무슨 정권 심판을 하겠다는 것이냐”는 다소 ‘거친’ 발언으로 각을 세웠다. 민주당 측에서 ‘대선후보’인 손학규 후보와 강 후보와의 대결을 ‘급수’가 다른 인물대결로 내세우려는 것에 대해 비꼬는 발언이었다.
강 후보 측에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분당 민심을 설득하고 있다. 강 후보는 “나는 분당에 대해 공부할 것도 없다. 분당역이 어딘지, 오리역이 어디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역 위치도 제대로 모르는 후보가 헤매는 사이 소는 누가 키우느냐”며 근래 인기를 끌고 있는 한 개그프로그램의 유행어로 빗대기도 했다.
강 후보를 수행하고 있는 김영태 비서관은 “다니다보면 지방과는 달리 민심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다. 지방분들은 싫으면 대놓고 내색하시고 악수도 안 받고 명함을 건네도 바로 버리는 분들도 있는데, 이곳 분들은 일단 악수는 다 받아주시기 때문에 속내를 도통 알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지율에서 강 후보와 점점 격차가 줄어들며 손 후보가 ‘맹추격’을 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흐름과 실제 바닥 민심은 다르다는 것이 강 후보 측의 판단이다. 김 비서관은 “손 후보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후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표출하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날 강 후보는 늦은 밤까지 주택가 유세와 퇴근길 인사, 상가지역 유세를 이어갔다. 주택가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강 후보는 군데군데 한 사람이 있는 가게라도 일일이 들어가 악수와 인사를 건넸다. 한 미용실을 들렀다 나오는 강 대표가 “이 분은 날 꼭 찍어주신다고 하시네”라고 말한다. “저런 말을 들으면 힘이 나겠다”는 말을 건네자 그는 “이런 분들 많으시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거리유세 도중 손학규 후보 측 자원봉사자들이 지나가자 강 대표는 악수를 건네며 “고생하신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늦은 시각이 되자 강 후보의 양복 바짓단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어깨 양쪽에도 먼지가 소복이 쌓였다. 강 후보를 따라다니며 선거전을 간접 체험한 기자의 신발 뒷굽도 아침보다 닳아 있을 정도였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 NHN 본사를 방문하는 등 젊은 층 유세에 주력한 민주당 손학규 후보가 길가는 유권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정치와 국민의 간극은 여전히 깊었다. 하지만 그 틈 속에서 손학규 대표는 희망을 발견한 듯 보였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지난 4월 14일, 분당 정자동의 NHN 본사 앞에 선 손학규 대표는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겸연쩍은 표정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손 대표는 ‘네이버’ 본사 직원들과 악수를 하기 위해 출입문으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지만 점심행렬은 홍해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제1 야당 당수의 손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딱 걸려든 몇몇 직원들은 할 수 없이 손 대표와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도망가던’ 직원들도 일단 악수를 나눈 뒤에는 대체로 만족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손 대표를 피해 멀리 달아나려던 군중심리와 달리 일단 그와 스킨십을 나누었던 젊은이들은 ‘승리하십시오’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더 적극적으로 사진촬영을 요구하는 모습도 자주 연출됐다. 저만치 도망가던 한 직원은 “아, 악수라도 할걸. 이 지역이 야당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무심코 흘렸다. 그를 외면했던 또 다른 시민은 “손 대표의 네임밸류 치고는 응원단(차량유세단을 지칭)이 좀 부실하네”라며 심드렁한 표정 뒤에 숨겨 논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도망가다 잡힌(?) 한 여성은 그에게 음료수를 선뜻 주었고, 지나가던 한 승용차 운전자는 차를 세우고 두 팔을 올려 하트 모양을 그려 보이기도 했다.
손 대표가 공식 선거운동 첫날 ‘미래’와 ‘희망’을 얘기하기 위해 젊은층의 ‘아지트’인 네이버 본사를 방문한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지난 12일 <국민일보>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분당을 지역 유권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손학규 후보는 30대와 40대에서 각각 65.8%와 61.7%로 강재섭 후보의 28.9%, 33.8%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은 지지도를 보였다. 실제 손 대표와 악수를 나눈 젊은 층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손 대표의 손에 이끌려 강제악수를 했지만 이내 그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이 지점에 이번 분당을 재보선의 1인치 승부처가 숨어 있다.
사실 분당이 ‘야당의 무덤’이긴 하지만 이번 재보선만큼은 무덤 밑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야당 당수 프리미엄에 대권주자에 대한 배려 등으로 손 대표 지지율이 강재섭 전 대표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는 조사도 나오고 있다. 손 대표의 한 오랜 측근은 “분당 지역 사람들이 좀처럼 표심을 드러내지 않아 좀 걱정이다”라며 애써 몸을 낮추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긍정적인 뜻도 숨어 있다. 바로 전체 지지율에 잡히지 않는 ‘숨은 표심’이다.
NHN 본사 앞 유세에서처럼 손 대표를 보고 도망치던 사람들이 실제로 그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애정을 담아두고 있듯, 이번 재보선도 숨어 있는 중도층의 표심에서 승부가 갈릴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손 대표가 이날 선거운동 도중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어려운 결정했다’ ‘큰 결단 했다’는 반응을 많이 접했다”고 말한 대목도 숨어 있는 표심을 경험하면서 얻은 자신감의 발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숨은 표심이 투표율로 이어진다면 손 대표에게 상당히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다.
손 대표는 숨어 있는 표심을 견인하기 위해 미래와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는 공식선거 운동 첫날 첫 일정으로 분당의 IT업체 네오위즈 본사를 방문했다. 국내 최대 온라인 게임업체를 방문해 젊은 층을 향해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는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경기지사 시절 정부를 4년 동안 설득해서 판교테크노밸리를 유치했다. IT산업은 우리나라의 미래성장 동력이며 그 주역들이 한국정치의 변화와 희망을 이끌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전략은 이번 재보선을 차기 대선과 분명하게 연동시키는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재보선에서 끊임없이 되뇌는 ‘미래’와 ‘희망’은 차기 대선 때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야당의 주테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역구 선거의 의미를 너무 크게 키워 자충수를 둘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공식선거 운동 첫날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삼고 IT업체 두 곳을 공략했다. 그 뒤 정자동 주민센터를 돌며 주민들과 스킨십을 나누고, 미금역 사거리에서 퇴근길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상가 등을 돌며 유세를 이어나갔다. 요즘 그의 수면시간은 보통 3~4시간에 불과하다. 네오위즈에서 한 직원이 “하루 수면시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IT업체에 종사하는 여러분들보다는 잠을 많이 잘 것”이라면서도 구체적인 답변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 대표의 체력은 원래 강철이다. 민심-희망대장정과 같은 고강도 행군 때 주변 참모들이 먼저 쓰러질 정도로 체력에 관한 한 특급이다.
그런데 힘만으로 안 되는 게 정치다. 손 대표의 유세 전략을 두고 민주당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명색이 야당 당수인데 유세 분위기가 너무 가라 앉아 있다” “체면 차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덤벼들어야 하는데 손 대표가 쭈뼛거리기만 하는 것 같다”라며 못마땅해 한다. 여기에는 손 대표 자신의 선택이 아닌 등 떼밀려 나온 데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손 대표는 네오위즈를 방문한 자리에서 “내가 국회의원 한 번 더 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그 이면에는 제1 야당 당수가 1년도 남지 않은 지역의 재보선에 나서는 것이 겸연쩍다는 의미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손 대표는 김해 을 후보단일화에서 ‘꼬마당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에게 패퇴, 이번 분당을 선거 결과가 더욱 중요하게 됐다. 단일화의 명분과 실리도 모두 뺏기고 분당 을 승리도 내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면 대권가도에도 적잖은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특히 유 대표의 지원유세 요구를 거절한 것을 두고도 “자신 없는, 소극적 대응”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기에다 민주당 ‘주류’로부터 끊임없이 대권주자 테스트를 받고 있는 그의 외로운 처지가 이번 재보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손학규 대표의 공식 유세 첫날 분위기는 ‘예상대로’ 그리 떠들썩하지 않았다. 당의 지원을 물리치고 나 홀로 선거를 이미 선언했기 때문이다. 선거유세 차량에서 지원을 하던 대학생들의 ‘힘없는’ 댄스도 대표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뒷말이 나왔다. 지역구 선거임에도 대선을 바라보는 ‘이중성’ 때문에 철저한 바닥선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중전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손 대표는, 그를 피하며 홍해처럼 갈라지는 유권자들을 향해 뛰어들고 있다. 바로 숨어 있는 1인치의 표심을 캐내기 위해서.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