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호랑이 ‘사랑의 힘’으로 벌떡
▲ 6월 17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KIA와 삼성의 경기에서 KIA 김진우가 8회초에 등판, 2사 1루에서 삼성 강명구를 삼진처리한 후 마운드를 내려오고 있다.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
6월 17일 KIA는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렸다. 1군 선수 등록·말소에 관한 내용이었다. 8개 구단에서 매일같이 보내는 내용이라, 이 보도자료에 관심을 나타낸 기자는 적었다. 그러나 등록 선수가 김진우라면 사정이 달랐다.
KIA는 보도자료에 ‘김진우를 1군 엔트리에 등록하고, 이상화를 말소했다’고 밝혔다. 2007년 7월 8일 이후 한 번도 1군 경기에 나서지 않았던 김진우가 근 4년 만에 1군 무대에 올라온 것이었다.
사실 김진우는 2007년 7월 이후 야구판을 떠나 있었다. 그 해 KIA가 임의탈퇴로 공시한 이후 김진우는 무적 선수나 다름없었다.
광주 진흥고 시절 ‘제2의 선동열’로 불렸던 김진우는 2002년 역대 신인 계약금 공동 1위에 해당하는 7억 원을 받고 KIA에 입단했다. 데뷔 첫 해 시즌 초반만 해도 김진우는 선동열의 재림이었다. 3경기에 등판해 3승을 따내며 전무후무한 고졸 신인투수 데뷔 3경기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때 그의 평균자책은 0.40에 불과했다.
그 해 12승11패, 평균자책 4.07, 탈삼진 177개를 기록한 김진우는 시즌을 마치자마자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야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며 병역혜택을 받았다. 다음 해에도 11승5패 평균자책 3.45를 거둔 김진우는 명실 공히 KIA 마운드의 중심이 됐다. 2006년까지 김진우는 15승 이상을 거두진 못했지만, 해마다 2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잦은 부상에도 팀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김진우는 스스로에겐 헌신적이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자신을 파탄의 늪으로 밀기 시작했다. 2005시즌 김진우는 개막 이후 10경기에 선발로 등판했다. 그러나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컨디션 난조였다. 그러나 그즈음 김진우는 야구장보다 유흥업소에 더 자주 출입했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훈련 시간도 제때 지키지 못해 혼이 나기 일쑤였다.
김진우의 방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출발점이었다. 김진우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외동아들인 김진우에게 어머니는 부모이자 친구였다.
김진우는 KIA 입단이 확정되자 주변에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는 건 지금부터”라고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KIA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 7억 원 중 4억 원을 들여 2층짜리 상가주택을 지었다. 1층은 개인택시를 처분한 아버지의 카센터로, 2층은 가족이 살 가정집으로 쓸 요량이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김진우는 일본 오키나와의 마무리캠프에서 땀을 쏟고 있었다. 그때 광주에서 오키나와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진우는 한참 뒤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김진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지어준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 터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김진우에게는 인생의 구명보트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연습벌레로 소문났던 김진우는 그때부터 조금씩 변했고, “아버지가 좋아해 커서는 입에 대지 않겠다”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야구장 안보다 밖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도 잦아졌다.
2003년 김진우는 폭행사건에 2번이나 연루돼 한동안 마운드를 떠나야 했다. 이 때문에 15승도 충분하다는 예상과 달리 11승에 그쳤다. 2004년에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갑자기 우측 넓적다리뼈 부상을 당했다. 그 해 그는 7승에 그쳤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이 아무개 씨와 결혼하며 김진우는 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김진우의 방황은 더 심해졌고, 부상을 핑계로 훈련을 거르는 횟수도 늘어났다.
2007년 김진우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야구 때문이 아니었다. 빚 때문이었다. 그 해 광주구장엔 “김진우가 어딨느냐”며 구단 사무실을 찾는 사채업자들이 많았다. 구단은 김진우에게 가불 형식으로 돈을 줘 빚을 갚도록 했다. 하지만, 1억 원에 가까운 연봉도 빚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다 동료 선수들에게 돈을 꾸고서 갚지 않아 김진우는 팀에서도 외면당하는 처지였다.
그즈음 김진우는 어깨부상을 호소했지만, 구단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김진우는 그해 7월 10일 2군행을 통보받은 이틀 뒤 팀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채 행방을 감췄다.
KIA는 20일이 지나고서,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무단이탈 중이던 김진우를 임의탈퇴선수로 공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부터 김진우는 야구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선수가 됐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진우가 2001년 초고교급 투수로 통했던 광주 진흥고 시절, 2002년 KIA에 입단한 첫해, 2008년 구단에서 방출된 직후, 2011년 6월 17일 삼성전에서 8회 투구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가며 서재응과 포옹하는 모습. |
2007년 7월 임의탈퇴 선수가 되자, 김진우는 모교인 광주진흥고와 경찰청 등에서 훈련하며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꾸준하지 못한 훈련과 자기 관리 실패로 재기를 위한 몸부림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경찰청의 아무개 코치는 “김진우처럼 불성실한 선수는 난생처음 봤다”며 “저런 선수는 프로야구 복귀 자체를 막아야지 그대로 받아줬다간 다른 선수들에게도 피해를 입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진우도 그즈음 현역 선수에 대한 미련을 버린 듯했다. 그는 2009년까지 야구공을 쥐지 않았다. 친구 집을 전전했고, 아내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광주 시내 술집에서 그를 봤다는 제보가 전부였다.
그러던 지난해 3월. 김진우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김진우는 일본 간사이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는 코리안 해치에 입단한 터였다. 연봉을 묻자 김진우는 “월봉 20만 엔을 받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진우는 “돈보다 해치에서 열심히 몸을 만들고 실전경험을 쌓아 재기에 성공하는 게 목표”며 크게 아쉽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KIA 역시 김진우를 임의탈퇴신분으로 묶어놨음에도 그의 재기를 위해 한 시즌 동안 해치에서 뛰는 걸 조건 없이 허락했다.
오사카에 있던 김진우는 팀 훈련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개인훈련 역시 충실히 진행했다. 팀에 합류한 지 한 달 만에 실전 마운드에 오른 것도 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해치 코칭스태프 사이에서 “5월 이면 김진우의 실전투구가 가능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그러나 해치가 재정난으로 간사이 독립리그에서 탈퇴하고, 약속한 월봉도 제때 지급하지 않으며 지난해 6월 김진우는 꿈에 그리던 마운드 대신 쓸쓸한 귀국길에 올랐다. 김진우의 재기 노력을 좌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KIA는 달라진 김진우에 주목했다. KIA 운영팀은 김진우가 귀국하자마자 광주 동강대의 협조를 얻어 김진우가 그곳에서 훈련하도록 배려했다. ‘반드시 재기해 광주 무등구장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김진우의 다짐은 더 확고해졌다.
올 시즌 KIA 재활군에서 몸을 만들던 김진우는 드디어 6월 15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넥센과의 2군 경기에 선발등판했다. 4년여만의 실전투구에서 김진우는 시속 146㎞짜리 강속구를 던지며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당시 KIA 조범현 감독은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그러나 “2군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며 전격적인 1군 승격을 시사했다. 아니나다를까 조 감독은 하루 뒤 김진우를 1군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마운드 오르는 이유
17일 광주 삼성전에서 김진우는 8회 등판해 4타자를 상대로 1안타만 내주고, 삼진은 2개나 잡는 좋은 투구 내용을 기록했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와 시속 150㎞에 육박하는 강속구는 예전 그대로였다. 경기가 끝나고서 야구전문가들은 “허약한 KIA 불펜진을 고려할 때 김진우를 마무리로 기용해도 좋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김진우는 칭찬이 무색하게 19일 삼성전에선 3타자를 상대로 2볼넷을 기록하는 등 좋지 않은 제구를 선보였다. 김진우를 마무리로 기용하기엔 아직 제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두 번의 등판을 지켜본 조 감독은 “두 번째 등판에서도 공은 좋았다”며 김진우에게 신뢰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앞으론 점수 차가 여유 있는 상황에서 등판시킬 것”이라고 말해 당분간 마무리나 셋업맨 등은 맡기지 않을 뜻임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KIA 이강철 투수코치도 “김진우는 아직 몸을 만들어가는 단계”라며 “필요 이상의 기대는 오히려 선수에게 부담될 것 같아 이런저런 주문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투수조의 선참 유동훈은 김진우의 재기를 긍정적으로 예상했다. “확실히 야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훈련시간에도 늦지 않고, 웨이트트레이닝도 알아서 열심히 한다. 무엇보다 술을 많이 줄인 모양인지 아침에 봐도 얼굴에 생기가 돈다.”
김진우가 이처럼 극적으로 변화한 데는 여자친구 김혜진 씨의 공이 컸다. 평소 ‘오빠, 동생’ 사이로 알고 지낸 두 사람은 지난해 2월 미국 유학을 갔다가 잠시 돌아온 김 씨를 김진우가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며 연인 사이가 됐다.
김진우가 해치에 입단해 다시 야구공을 잡은 것도 “아까운 재능을 죽이지 마라”는 김 씨의 조언 때문이었다. 김진우는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면 마운드에서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훈련에 임했다”며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여자친구를 생각하면 잡념이 사라진다”고 털어놨다.
김진우가 4년 만의 복귀전을 끝내고 관중석에 있던 여자친구에게 달려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김진우는 자신의 말마따나 사랑을 위해 야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우는 김 씨에게 “올 시즌 성적이 좋으면 결혼하자”고 이미 프러포즈를 한 상태다. 만약 복귀전처럼 호투를 거듭한다면 김진우는 다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KIA의 한 선수는 선배 김진우를 보며 이런 농담을 했다. “다른 선배들이 (김)진우 형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부모님도, 감독님도 하다못해 구단 단장님이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비 형수님 한마디면 완전히 순한 양이 된다고 한다. 진우 형이 던질 때마다 예비 형수님을 더그아웃에 앉히면 어떨까? 그럼 노히트노런이나 퍼펙트 게임은 식은 죽 먹기 아닐까?”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