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재벌 흔든 건 ‘다윗’의 돌
▲ 도청 스캔들에 휩싸인 루퍼트 머독이 지난 20일(현지 시각) 런던 자택을 나서며 자신이 1면에 등장한 <더타임스>를 읽고 있다. 머독은 전날 아들 제임스 머독과 함께 영국 하원의 청문회에 참석해 이번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자신은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로이터/뉴시스 |
온통 루퍼트 머독(80) 얘기다. 호주 출신의 언론 재벌 말이다. 영국 3대 일간지를 훑어봐도, 공영방송 BBC 밤 10시 뉴스를 틀어도, 술집 안에 있어도, 요즘 영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독이 가진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반면 머독에게는 이번 달은 악몽 같은 달이었을 것이다. 그가 소유했던 신문이 불법 취재한 사실이 밝혀져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타블로이드신문인 <뉴스오브더월드>는 영국 경찰을 매수해 최대 4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또는 휴대전화 도청을 통해 사생활을 파헤친 다음 기사화했다. 유명 축구선수와 전직 영국총리, 범죄 피해자 등이 도청 피해자였다. 7월 10일 <뉴스오브더월드>는 도청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168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폐간되었다.
새옹지마. 고령으로 몸을 이끌고 청문회에 선 머독을 보며 든 생각이다. 지난 19일 차남 제임스와 나란히 영국 청문회에 출석한 머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킹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늘 당당했던 그의 방어적인 모습은 어딘가 낯설었다.
머독은 호주 멜버른 태생으로 유명 종군기자이자 신문발행인이었던 아버지 키스 머독 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랐다. 소년 시절 엄격한 장로파 교회에 다녔던 그는 대학 시절 인문학을 접하며 좌파적 사상에 경도되었다.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과 철학, 경제학 등을 전공한 그는 구소련의 혁명가 레닌의 흉상을 기숙사 방에 두었다. 그렇지만 그의 성장기를 지배한 건 신문쟁이라는 ‘정체성’이다. 1992년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된 책 <머독>(지은이 제롬 터쉴레)에 적힌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나는 신문쟁이 집안에서 자랐고 스스로 그 점에 흥분했다. 아버지 덕분에 신문쟁이의 삶을 밀착해서 바라보았고, 열 살이나 열두 살 무렵쯤에는 다른 인생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보도의 세계, 신문의 세계에서 살고 있노라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학업보다 영향을 미친 건 졸업 후 영국의 대중지 <데일리익스프레스>에서 2년 동안 수습기자로 일한 경험이다. 1952년 아버지가 타계하자 그는 호주로 돌아와 애들레이드 시의 <선데이메일>과 <뉴스> 등 2개의 신문사를 상속받고 그 경험을 십분 살린다. 그는 두 신문의 ‘야마(주제)’를 유명 배우의 스캔들이나 섹스 관련 소재, 스포츠와 범죄 등에 맞추고 신문 판매 부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데일리메일> 등 호주 내의 신문사를 인수하거나 통합하여 별명 ‘식인상어’처럼 세력 확장에 나선다.
모든 성공한 사업가들이 그렇듯 그는 만족을 몰랐다. 1960년대 후반 영국에 진출한 머독은 <더선>과 <뉴스오브더월드>를 소유하며 여성의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반신 누드를 싣는 등 한층 업그레이드된 선정성을 보인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이른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두 신문은 지지고 볶는 일상적 삶에 지친 기층 민중을 배려한다. “사진은 크게 쓰고 기사는 짧게 쓰라.” 그는 <더선>을 인수한 지 1년 만에 발행 부수를 두 배로 늘리며 80년대에 정론지인 <더타임스>를 인수하기도 한다.
신문은 방송과 달리 정치성이 선명히 드러나는데, 이 역시 머독이 적극적으로 실천한 부분이다. 머독은 80년대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을 지지했고, 90년대 중후반에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을 지지했다. 머독의 지지를 받는 세력의 공통점은 노조해산이나 구조조정 등 친기업 정책을 추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지지하는 등 친미 성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언론계에 뛰어들면서 대학 시절 그를 지배한 좌파적 사상을 버리고 우파로 변절한 것이다.
정당들은 그의 반대를 총선의 패배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지난해 총선 때 <더선>은 ‘우리는 노동당의 공약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1면에 대놓고 밝혔고, 노동당은 13년 만에 정권을 보수-자민 연합당에게 내주었다. 지난 13일 런던 중부에 있는 공영방송 ‘채널 4’ 앞에서 만난 한 PD는 “머독 소유의 신문들은 1면에 같은 내용을 싣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한다고 밝히면 독자는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머독은 적어도 신문 시장에서 영국 여론을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머독에게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90년에 그가 소유한 ‘스카이뉴스’는 시청률 부진 등 부채가 27억 달러에 달했다. 여기에 낮은 광고 수익과 이자율이 높은 단기 부채에 의존하는 등 곪았던 부분들이 일제히 터지며 그는 총 부채 76억 달러를 안고 있었다. 그가 훗날 인정했듯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데 따른 결과”였다.
늘 그랬듯이 돌파구는 ‘합병’이었다. 경쟁사인 BSB의 관계자들과 만나 ‘함께 살자’며 예기치 못한 화해를 성사했고 시티은행 등과 접촉해 부채를 재조정했다. 무엇보다 영국 공영방송 BBC를 설득해 당시 출범한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의 중계권 전권을 6억 달러에 사들였다. 그 결과 100만이 넘는 부가 시청자를 안방으로 끌어들였고 예약 서비스제 등을 통해 ‘아무나 볼 수 없는’ 중계방송을 만들었다. 당시 TV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3억 5000만 달러에 이르며 위기를 탈출했다.
언론계 시장에서 미국 보도 채널 <CNN>의 회장 테드 터너 정도가 라이벌로 꼽혔지만 공교롭게도 그를 무너뜨린 건 ‘정론’이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00년대부터 신문시장에서 약 40%의 점유율을 보인 머독의 독점화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실었고, 올해 초 1월에는 4~5면에 걸쳐 집중보도하며 머독에 대한 공격을 앞장섰다. <가디언>은 영국 신문사 가운데 최초로 <뉴스오브더월드> ‘도청 의혹’을 보도했고, 지난달 초 그 의혹을 ‘사실’로 보도하며 경찰의 수사를 끌어냈다. <가디언>은 영국의 대표적 진보 언론으로 기자들의 월급은 머독의 언론사보다 30% 정도 낮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그의 패배를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뉴스오브더월드>는 폐간됐고 염원하던 ‘스카이뉴스’ 100% 인수는 물 건너갔지만, 세계 52개 국에서 780개 이상의 조직을 갖고 있다. 그가 소유한 <더타임스>도 비판조에서 ‘차분조’로 옮기며 점차 머독 비판에서 이탈하고 있다. 20일 런던 중부에서 만난 게리 맥클러스키(45)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 있으면서 머독에 대해 느낀 건 그가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다. 예전만한 권위를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그가 몰락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영국=이승환 통신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