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스타 빠졌지만 깜짝스타 희망 있다
▲ 지영준이 2010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
#더 큰 목표 위해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지영준은 최종 대표팀 제외가 결정된 후에는 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만 방을 나올 뿐 거의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 답답했던 정만화 남자 마라톤대표팀 감독(51·상지여고 감독)이 지난 8월 5일 “여기(양구) 있지 말고 집(원주)으로 가라. 가면 잘 아는 병원도 있고 하니 푹 쉬면서 몸을 만들어라”라고 주문했지만 지영준은 가만히 듣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강원도 양구에서 대표팀 합숙훈련을 지도하고 있는 정만화 감독은 “그 속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겠는가? 부상을 없애기 위해 정말이지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약물파동으로 모함을 받을 때도 오직 세계선수권에서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며 견뎠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침통하겠는가?”라고 설명했다.
지영준은 지난해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2시간11분11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기록과는 격차가 있지만 기록싸움이 아닌 무더운 날씨 속에 체력싸움을 전개하는 세계선수권에서는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세계 3대 스포츠제전으로 꼽히는 세계육상선수권에서 개최국 한국이 메달에서는 기대할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이다.
이런 지영준은 지난 3월 서울국제마라톤과 4월 대구국제마라톤에서 감기와 허벅지 근육통을 이유로 뛰지 못했다. 올해 42.195㎞ 풀코스를 한 번도 뛰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6월에는 동료 육상인으로 추정되는 투서에 의해 금지약물 복용혐의로 경찰조사까지 받았다. 무혐의로 최종결론이 나긴 했지만 지영준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누가 그런 투서를 했는지 짐작이 갔고 법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려고도 했지만 세계선수권을 위해 분한 마음도 달래고 말았다. 그런데 대회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부상으로 출전포기를 최종 결정한 것이다.
지영준의 부상 부위는 오른쪽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부분이다. 햄스트링이 시작되는 곳으로 사실 지난 3월부터 통증이 심했다. 의사가 길면 (통증이) 6~7개월 갈 수도 있다고 했는데 끝내 치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지영준은 부상 치료를 위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병원치료와 마사지는 물론이고 앉아 있는 자세가 나쁜 영향을 준다는 지적을 받자 밥도 업드려 먹고 이동할 때도 승용차 뒷자리에 눕곤 했다. 좀 괜찮아지면 조깅을 하고 때로는 하루 20~30㎞의 거리주도 실시했는데 차도가 없었다. 통증 부위가 옮겨 다니고 시기도 종잡을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세계선수권 출전 포기를 결정한 것은 지난 7월 30일이었다. 20km를 뛰려고 나갔는데 1㎞지점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억지로 7㎞까지 뛰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포기했다.
지영준은 “서른 살이 되도록 부상으로 대회를 뛰지 못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대회를 준비해온 까닭에 도저히 ‘포기’라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부상을 안고 훈련을 하고, 대회에 출전했다가는 내년 런던올림픽까지 지장이 생길 것 같았다.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영준은 일단 최대한 빨리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할 예정이다.
#정진혁-황준현 기대
▲ 올해 서울 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차지해 차세대 간판으로 자리매김한 정진혁. 연합뉴스 |
그럼 지영준이 빠진 한국 마라톤의 목표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두 가지가 있다. 번외경기이기는 하지만 공식시상이 치러지는 남자 마라톤 단체전 입상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깜짝 스타의 탄생이다.
마라톤 단체전은 5명이 출전해 상위 세 명의 기록을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한국은 이미 2007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11회 대회에서 7시간12분08초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딴 바 있다. 지영준이 빠졌지만 올해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9분28초를 찍고 깜짝 2위를 차지해 차세대 간판으로 자리매김한 정진혁(21·건국대)과 코오롱의 황준현(최고기록 2시간10분43초)이 좋은 컨디션을 보이고 있다. 박주영(한국전력·2시간16분02초), 이명승(삼성전자·2시간13분25초), 황준석(서울시청·2시간16분22초) 중 한 명만 2시간16분대로 골인한다면 충분히 메달 획득이 가능한 것이다. 단체전 우승 가능성이 80~90%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오고 있다.
두 번째는 홈 코스 대이변의 가능성이다. 런던, 로테르담, 시카고, 뉴욕 등에서 열리는 A급 국제대회는 보통 날씨가 좋은 봄이나 가을에 열린다. 코스도 세계최고기록을 의식해 평탄하게 조성한다. 하지만 전 세계를 돌며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은 무더위가 심한 여름철에 열리고, 코스도 새로 조성한 곳이 많다. 당연히 기록보다는 순위싸움으로 펼쳐지고 최근 스피드 위주의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맞서 체력이 좋은 아시아나 유럽선수들이 한번 해볼 만한 대회다. 대구는 한국에서도 덥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날씨에 익숙한 한국의 유망주들이 큰 이변을 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정만화 감독은 “황준현한테 공을 많이 들였는데 최근 준현이가 정말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늘고 있는 정진혁도 제법 컨디션이 좋다. 세계 선수권 레이스는 이변이 많은 만큼 지켜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더위는 우리 편이다. 하늘이 도와주면 깜짝 쾌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