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얼굴로 악마를 연기하다
▲ 알랭 들롱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국제적인 스타가 됐다. |
1935년에 태어난 알랭 들롱은 네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양부모의 손에서 성장했으나 양부모마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재혼한 생모에게 돌아가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는 자전거 타기와 축구, 영화 보기를 즐기는 활동적인 소년이었고 학교에서는 소문난 악동이었다. 부모는 수없이 가톨릭계 기숙사 학교에 들롱을 집어넣었지만 끊임없이 퇴학당하는 바람에 열 군데도 더 학교를 옮겨야 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그는 방황기를 겪다가 군에 입대한다.
가족다운 가족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들롱은 군대에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유대감과 가정의 안락함을 느꼈지만, 공수부대 소속이었던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악명 높았던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여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스물한 살에 제대한 그는 파리에서 웨이터, 세일즈맨, 짐꾼 등의 일자리를 전전한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그는 몇몇 배우들과 친분을 쌓는데, 이때 알게 된 배우 장클로드 브리알리와 칸영화제에 무작정 참석한다. 배우가 되기 위한 무모한 도박이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맨 앞줄에 앉았고 빌린 파티 정장으로 입고 만찬에 기웃거렸던 알랭 들롱은 영화제가 끝날 무렵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반항적 이미지, 전쟁과 뒷골목 생활이 남긴 거친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호한 섹슈얼리티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매혹시킨 것.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제임스 딘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새로운 청춘스타로 그를 점찍어 장기 계약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 남는다.
연기 수업은 물론 엑스트라 경험조차 없던 그는 1957년에 배우가 되었고 1958년엔 <크리스틴>으로 첫 주연을 맡는다. 이 영화에서 만난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진 그는 다음 해 약혼했고 1959년엔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로 국제적인 스타가 된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을 떠올리는 그의 외모가 주는 매력은 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들롱은 한때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것은 그의 마성적 이미지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 정체성이기도 했다. 영화화가 미뤄져 성사되진 않았지만 들롱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에서 브래드 피트가 맡았던 루이 역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만약 그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면 영화사상 가장 강렬하면서도 섹시한 흡혈귀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 그는 범죄 영화의 세계에 빠진다. 그 시작은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사무라이>(1967). 이 영화는 미소년 이미지가 기반이던 당시의 들롱에게 또 하나의 치명적 캐릭터를 선사했고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천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냉혹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옴므 파탈의 매력은 이후 알랭 들롱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하지만 1968년에 들롱의 친구이자 보디가드인 스테판 마르코비치가 쓰레기 하치장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면서 수사 과정에서 과거 총기 거래 사건에 가담했던 들롱의 과거도 함께 드러났다. 나중에 혐의를 벗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관객들이 그의 극중 캐릭터를 더욱 리얼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 이후 들롱은 1970년대 내내 범죄 액션영화에 출연한다. 사람들은 암흑가 출신이었던 들롱이 화면에서 갱스터로 등장하는 걸 보기 원했고 들롱도 영화 속에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예 <볼사리노>에서는 1930년대 마르세이유 지역의 갱으로 출연했고 이 영화의 성공은 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들롱은 갈리아족의 완벽한 외모였으며 특히 그의 눈빛은 다른 배우들이 두 시간 동안 대사로 전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젊고 에너지에 넘치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하며 허무하게 죽어가던 그는 여성 관객뿐만 아니라 남성 관객들에게도 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배우였다.
1998년에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는 말과 함께 은퇴했지만 10년 후 다시 돌아와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알랭 들롱. 그는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