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랄 땐 ‘살랑살랑’ 받고 나면 ‘뺀질’
▲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섬유업체에서 일하는 C 씨(여·32)는 메신저에 직장 선배가 들어올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또 말을 걸어서 돈 빌려달라는 소리를 할까 싶어서다. 본사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다 1년 전쯤 지방 지점으로 내려간 선배다. 같이 근무할 때는 매일 붙어 다니면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던 사이였는데 근무지가 달라지면서 연락이 거의 끊겼다.
“한 달 전쯤 갑자기 메신저로 선배가 말을 걸더니 돈 좀 모았느냐고 하는 거예요. 모았다고 하면 당장 달라고 할 기세라 일단 없다고 딱 잡아뗐죠. 첫날에는 곱게 물러나더군요. 그런데 그 뒤로 이틀에 한 번꼴로 말을 걸어서는 진짜 모아놓은 거 없느냐면서 자꾸 사정 얘기를 흘려요. 당장 여유자금은 50만 원 정도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달라고 해서 결국 빌려줬습니다. 이러면 말이 쏙 들어가겠다 싶었죠. 웬걸요, 물꼬가 트였다고 생각했는지 염치없이 좀 더 빌려달라고 그럽니다. 그냥 무시하기도 어렵고 고민이네요.”
칼같이 거절을 못해 고민했던 건 Y 씨(30)도 마찬가지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어머니 병원비가 급하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 150만 원을 빌려줬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있단다.
“가족이 아프다는데 바로 거절하기가 참 곤란하더라고요. 큰 문제야 생기겠나 싶어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그 동료가 돈을 갚기로 한 날짜를 어기고는 체크카드에 문제가 잠깐 생겼다, 이체 했는데 계좌가 잘못됐다, 다른 데서 돈 들어올 데가 있다는 등 요리조리 피해가기만 하더군요. 집에서는 바보같이 거절도 못하고 빌려줬다고 달달 볶이고 있고요, 소문에 그 동료는 가불한 월급도 꽤 많다는 말이 들려오고 요새 속이 탑니다.”
믿지 않으면서도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고 빌려줬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있다. 물류 관련 회사에 다니는 H 씨(여·29)는 후배에게 뒤통수를 맞고 분을 삭이고 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 것 같다고.
“그 후배는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굉장히 살갑고 일도 곧잘 하더라고요. 재테크 지식도 상당해서 믿음이 갔습니다. 하루는 50만 원을 빌려주면 이자를 후하게 쳐 줄 수 있다기에 솔직히 꺼림칙했지만 빌려줬어요. 그런데 진짜 며칠 뒤에 20만 원 정도를 이자로 보태서 갚더라고요. 신용이 단번에 생겼죠. 그 뒤에는 150만 원을 빌려주면 지난번처럼 높은 이자를 더해주겠다고 하데요. 곧 이어 상당한 금액의 이자를 보태서 갚더군요. 며칠 뒤 이번에는 800만 원 정도를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역시 이자가 많겠지 하는 생각에 바로 빌려줬는데 이틀 뒤 후배는 바람처럼 사라졌어요. 지인들은 순진하게 그런 빤한 수법에 당했냐고 면박을 주네요. 찾을 길이 없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D 씨(여·34)는 동료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던 경험이 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직원이 급히 쓸 데가 있다고 5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 여유자금이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어요. 거절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집안 사정이 그리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아서 빌려줬습니다. 이틀 뒤에 갚는다는 말을 믿기로 했죠. 그 후 이틀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혹시나 그 직원이 사라질까 싶기도 했고, 후회하는 마음도 들고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더라고요. 약속한 날짜가 됐고 다행히 동료는 바로 돈을 갚았습니다. 무사히 돈을 돌려받긴 했지만 그때부터 다짐했어요. 그냥 줘도 되는 돈 아니면 절대 빌려주지 말자고요.”
비교적 거액의 돈을 직장 동료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IT 회사에 근무하는 A 씨(33)는 직장 동료에게 빌려준 돈 생각만 하면 속이 쓰리다. 속상하지만 현재는 거의 포기 상태다.
“1년 전쯤 대학 동기이자 회사 동료가 좋은 투자처가 있다고 정보를 흘리더라고요.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다 자기 돈 수천만 원을 투자하는 걸 보고 마음이 흔들렸죠. 10년 이상 본 동기라 덜컥 2000만 원을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일이 돌아가지 않았는지 이 친구가 여기저기 돈을 빌리는 것 같더군요. 그러더니 어느 날 사표를 내고 잠적을 해버렸어요. 아파트 계약기간이 끝나가서 그때 쓰려고 모아둔 돈이었는데 마음이 다급해졌죠.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나타나질 않더니 얼마 전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런데 개인회생신청을 했다지 뭡니까. 이젠 마음을 비웠습니다.”
외식업체에 다니는 J 씨(36)도 후배에게 빌려 준 2000만 원을 못 받고 있다. 못 받은 건 마찬가지지만 A 씨보다는 사정이 낫다. 일단 제대로 된 차용증과 각서를 받아놓았기 때문이다.
“원래 부잣집 자제로 씀씀이가 큰 후배였어요. 아버지 몰래 주식을 했는데 한 번에 다 날린 모양이더라고요. 아버지가 자식 버릇을 고치겠다고 그 사건으로 결혼 자금 및 주택마련 약속까지 몽땅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답니다. 그 일로 파혼당할 위기까지 갔고요. 그래서 저한테 SOS를 쳤어요. 자금 회수를 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일단 결혼은 해야겠다면서요. 황당하기도 했는데 당장 파혼은 막아줘야겠다는 생각에 빌려줬습니다. 그 후배 애가 돌이 다된 지금까지 한푼도 못 받긴 했지만 아직 큰 걱정은 없어요. 법적인 조치를 미리 다 취해놓기도 했지만 급해지면 일단 그 후배 외제차만 압류해도 빌려준 돈이 나오거든요. 저 같으면 일단 그 차를 팔아서 빚부터 갚을 텐데 그러고 있네요. 이해는 안 가지만 그래도 못 받을 일은 없을 듯해 조바심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친구한테 돈 빌려주면 돈도, 친구도 잃는다.’ 옛말 그른 거 없다고, 아는 처지에 돈 거래는 늘 아슬아슬하다. 애초 위험한 거래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