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도 미역국? 야구 콱 접어야죠”
▲ 야구가 종교인 부산에서 롯데의 주장으로 뛴다는 건 어떤 걸까. 도 닦는 심정으로 묵언수행까지 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꿈꿨던 홍성흔은 실패를 복기하기보다 내년을 기약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일단’ 소감
“시즌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밋밋했던 것 같아요. 3할(0.306)을 치긴 쳤어도 홈런도 타점도 이전보다 못하니까 빈손으로 시작했다가 빈손으로 마무리한 느낌이 들죠. 작년에 비해 올해는 그냥 망조가 든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변명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스포츠에선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 게임도 못하는 세상
“시즌 중에 (이)대호랑 저랑 PC방에서 게임에 열중하는 사진이 찍혀 인터넷을 떠돈 적이 있었어요. 솔직히 팬들은 재미삼아 그런 사진을 올렸겠지만 롯데 주장을 맡고 있었던 전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임방에 가서 게임하는 사진이 떡 하니 인터넷을 돌아다니니까 마치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마냥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 후론 완전히 게임을 끊었어요. 그런데 가끔은 답답할 때가 있어요. 도대체 선수들은 뭘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나요. 술도 안 되고 게임도 안 되고, 그러면 방에서 잠만 자야 하는 건지…, 답답할 때가 많아요.”
# 롯데 선수로 산다는 건
“부산은 야구가 종교인 지역이에요. 팬들의 입장에선 야구선수는 야구만 해야 하는 거죠. 딴짓했다간 금세 구설에 올라요. 야구 외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실수를 하는 날에는 절대 용서가 안 됩니다. 그만큼 야구를, 야구선수를 좋아해주는 곳이기도 해요. 그래서 전 올 시즌 주장을 맡고 가장 강조한 부분이 미니홈피나 SNS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남기지 말라는 거였어요. 팀에 대한 문제나 선수와 관련된 얘기는 직접 얼굴 마주보고 해야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얘기하는 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 동병상련의 양승호 감독
“저도 수비를 보면서 시즌 초 마구 허우적거릴 때 팀 성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양승호 감독님도 심한 비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셨어요. 그때 감독님이 절 부르신 후 하신 말씀이 ‘성흔아, 내가 올스타전까진 감독하게 해주라. 너무 일찍 그만두게 되면 안 되는 거잖아. 전반기는 제대로 마칠 수 있도록 선수들이 좀 도와주라’하고 얘길하시는데 너무 죄송하고 민망해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그때 저도 주장을 그만두려고 하던 참이었거든요. 감독님은 아마추어 감독 출신이시긴 하지만 프로에서 코치 생활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계산도 분명하고 굉장히 정교한 야구를 지향하십니다. 재미있는 건, 시합 들어가기 전까진 농담도 잘 하시고 장난도 잘 치는 ‘옆집 형’이신데, 6시 30분, 경기가 시작되면 바로 ‘감독님’으로 얼굴이 변한다는 사실이에요.”
# 욕 먹으며 사는 남자
“올해 저, 욕 무지하게 먹었습니다. 1년 내내 욕 먹는 걸로 시작해서 욕 먹고 시즌을 마친 기분이 들어요. 플레이오프 마지막 5차전 병살타가 꽤 깊은 상처를 안겨줬죠. 야구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뭔지 아세요? ‘홍턱’ ‘설레발’ ‘뻥카’ 등등의 비난 섞인 별칭은 개의치 않아요. 단 나이 먹어서 방망이 스피드가 떨어졌다는 소리는 진짜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요. 플레이오프 앞두고선 사직구장 근처의 절에 매일 불공드리며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바둥거렸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고요?”
# 수비해야 신이 나는 남자
“올해 외야수로 보직을 명 받고, 달리기에 스피드를 내려고 체중을 쫙 뺐습니다. 문제는 제가 외야로 나가기만 하면 팬들이 욕을 한다는 사실이었죠. 인정합니다! 제가 외야수 초보이고 다리도 느리다는 부분을. 그런데 저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시더라고요. 왠지 홍성흔이 외야수를 보면 실수할 것 같은 그런 선입견이요. 한번은 넥센전에서 제가 다이빙을 해서 공을 잡아내는데, 한 선수가 ‘성흔아, 넌 왜 물도 없는데서 다이빙을 하니?’라며 약을 올리더라고요. 김성근 전 SK 감독님께서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경기에서 지고 기분이 꿀꿀해졌을 때 하이라이트를 통해 홍성흔의 수비하는 장면이 나오면 절로 웃음이 나오신다고. 하하.”
# 리그 도루 2개, PO도 2개!
“네, 맞습니다. 올시즌 정규리그 도루가 2개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플레이오프 때 2개를 해낸 거예요. 이 정도면 거의 ‘도루왕’ 수준이죠. SK 정상호가 엄청 열받아 했었거든요(웃음). 단기전은 주자가 2루에 있을 때 득점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우리팀 중심타자들 중에서 도루할 수 있는 선수가 없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찬스가 났을 때 무조건 뛰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거죠. SK에선 제가 도루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을 거예요. 사직에서 두 게임 연속 도루에 성공하고 문학으로 넘어가니까 그때부턴 저에 대한 견제가 엄청 심해졌더라고요. 도루 비결이요? 투수가 공 한 개 던질 때마다 한 발짝씩 표시 안 나게 앞으로 나갔어요.”
# ‘병살왕’이라는 오명
“전 이만수 감독대행께서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셨기 때문에 선수를 거르는 등의 작전은 펼치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1차전 때부터 이대호를 거르시더라고요. 담담하게 받아들였죠. 상대팀 감독이 거른 타자 다음으로 타석에 선 제가 만약 병살을 치게 된다면 전 뭐가 되겠어요. 1차전, 2차전 잘 살아 나갔다가 마지막 5차전 때 이 대행님의 소원대로 병살을 치고 만 거죠. 그 순간, 정말로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찌질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안타 한 개 쳤으면 드라마가 됐을 텐데. 지금 생각해봐도 속이 쓰리네요.”
# 내년에도 주장? NO!
“플레이오프 5차전이 끝난 뒤 선수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주장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요. 전 ‘깜’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성적이 안 나왔는데 다음 해에 주장을 계속한다는 게 이상한 거죠. 1등을 할 수 있게끔 강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주장이 나와야 해요. 대호가 다른 데로 가지만 않으면 주장 후보 0순위인데…. 선수들이 잘 뽑겠죠 뭐.”
# 이대호의 해외진출?
“전 대호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해줄 거예요. 만약 대호가 일본 진출을 하게 된다면 타선에 큰 공백이 생기겠죠. 그러나 대호가 없다고 해서 롯데의 야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팀에 큰 손실이 생기는 건 분명하지만 좋은 타자를 영입하거나 전력 보강을 통해 대호의 빈자리를 잘 메우도록 노력할 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감독님이나 구단에서 잘 알아서 하실 부분이니까. 대호가 롯데에 없어도 지구는 돌아가잖아요(웃음).”
# 오승환 공에 대한 잡담
“승환이 공은 공 끝이 아주 좋아요. 직구가 오는 걸 알고 기다리고 있어도 칠 수 없을 정도죠. 퀵 모션이 들어갈 때 다른 투수들에 비해 반 박자 느리게 가는데 타자 입장에선 그 타이밍을 잡아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승환이 공을 칠 수 있느냐고요? 뭐, 승환이가 감기에 걸렸거나 컨디션이 완전 엉망일 때, 그리고 어깨가 아플 때(웃음)?”
# 가장 ‘쎈’ 놈은?
“류현진 오승환 윤석민 중에서 누구 공이 제일 치기 어렵냐고요? 흠, 짧게 봤을 때는 승환이 공이 제일 치기 힘들지만 길게 봤을 때는 아무래도 현진이 공이 제일 세죠. 석민이의 슬라이더도 압권인데, 선발 투수로 비교했을 때는 현진이 공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이 셋 중 한 명이라도 롯데로 데려 왔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 2011년은 ‘어제 내린 눈’
“이젠 올 시즌을 복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년을 어떻게 준비해가느냐가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년에는 아무래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될 것 같아요. 스프링캠프 동안 또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뛰어봐야죠. 만약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성적을 낸다면, 전 야구 그만둬야 해요.”
그리고 마지막, 2011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아무래도 삼성이 되지 않겠어요(웃음)?”
부산=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