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어렵지 않아요, 뻔뻔하면 돼요’
▲ 지난 18일 열린 농협중앙회 대의원 회의에서 최원병 현 회장이 차기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최 회장은 191표를 얻어 97표를 획득한 김병원 전남 나주 남평농협조합장을 이기고 연임에 성공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농협중앙회장은 책임은 없고 명예와 권한이 가득한 자리다. 농협 회장의 막강한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상근’에서 ‘비상근 명예직’으로 바꾼 것이 오히려 지난 4월 농협 전산장애 때 최 회장이 했던 발언처럼 농협 회장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준 꼴이 됐다. 당시 최 회장은 “비상근이라 책임질 것이 없다”면서 담당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농협중앙회장은 농협중앙회뿐 아니라 자회사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다. 또 농협중앙회의 어마어마한 자금을 운용하는 데도 결정적인 위치에 있다. 막강한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즉 인사권과 자금을 쥐고 있기에 가능하다. 이 때문에 농협중앙회장은 ‘농업계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동안 전국 농협조합장들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부정과 비리가 저질러지기도 했다. 농협중앙회장직이 그만큼 무소불위의 매력적인 자리라는 얘기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파악, 지난 2009년 2월 농협법을 개정해 농협중앙회장에 대한 선거제도를 ‘직선 중임제’에서 ‘간선 단임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문제를 키웠다. 여기서 직선제는 농민(조합원)들이 직접 뽑는 게 아니라 전국 조합장들이 뽑는 직선제를 말한다. 이 제도가 다시 조합장들을 대표하는 289명의 대의원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로 바뀐 것이다. 전국농협노조 민경신 위원장은 “간선제에서 이중간선제로 바뀌었을 뿐”이라며 “진정한 직선제란 농민들이 스스로 회장을 뽑는 것이며 이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경된 제도에서 현 최원병 회장이 다시 출마했다는 사실이 선거 전부터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아무리 규정상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회장으로 재임할 때 제도를 바꾸었는데 재출마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이 최 회장을 비판하는 요소 중 하나다.
농협중앙회장은 또 현 정권과 가깝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 비록 선출되기는 하지만 ‘낙하산 인사’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최원병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포항 동지상고(현 동지고) 4년 후배인 데다 이상득 의원과도 친분이 있는 대표적인 ‘MB맨’으로 알려져 있다.
‘살아 있는 권력’과 가깝고 거대조직 농협의 인사권과 자금을 쥐고 있는 농협중앙회장은 ‘비리의 온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한호선-원철희-정대근으로 이어지는 역대 민선 농협중앙회장이 비자금이나 횡령 등으로 모두 구속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농협노조와 주변 단체들이 최 회장을 강력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 회장이 인사권과 자금을 전횡했다는 것이다.
전국농협노조는 일찍이 최 회장이 아예 출마할 자격조차 없음을 꼬집었다. 민경신 위원장은 “90일 전에 농협 출연기관의 임원직에서 물러나지 않은 사람은 농협회장이 될 수 없다고 농협 정관에 규정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최 회장이 △상근직인 농협문화복지재단 이사장직을 선거 90일 전에 사퇴했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 △농민신문사 회장직과 농협대학 이사장, 농촌사랑범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논란이 됐다.
일부 농협중앙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 회장은 재선을 위해 자신의 선거 사조직인 ‘천년회’를 가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년회’는 2007년 12월 선거 당시 최 회장을 지원한 경주 안강 출신 23명을 중심으로 결성된 모임이라고 전해진다. “천년회 출신 자녀들이 농협에 특혜 취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이들의 전언. 농민신문사, 회장비서실, 농협중앙회 임원 등을 지내고 퇴직한 B 씨가 좌장 격으로 있다는 천년회 명단을 보면 현재 농협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상당수다.
이들을 중심으로 원칙 없는 인사가 빈번했으며 지난 4월 전산장애 사고 역시 최 회장의 인사 전횡이 원인이라는 것이 ‘천년회’의 존재를 비판하는 농협 관계자들의 말이다. 당시 민경신 위원장 역시 “사태의 중심은 최원병 회장”이라며 “재임 욕심으로 IT 비전문가를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 측은 “사적으로 조직됐다고 했기에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면서도 “일부 거론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절대 아니다’라며 펄쩍 뛰기는 했다”고 전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최원병 회장에게 선거 직전 두 가지 큰 호재가 생겼다. 첫째는 농협노조가 최 회장의 출마 자격과 관련해 서울시선관위에 질의했으나 서울시선관위가 “농협 정관에 대한 유권 해석을 내릴 권한이 없다”며 책임을 농협에 넘긴 것이다.
선거 전날 최덕규 후보의 사퇴도 최 회장으로서는 또 하나의 호재였다. 경남 합천 가야농협조합장인 최 후보의 사퇴로 경남 쪽 표를 비롯한 최 후보의 표가 최 회장에게 몰렸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최 회장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김 후보를 따돌린 것도 최덕규 후보의 사퇴가 큰 힘이 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최원병 회장과 김병원 후보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표하는 후보로도 관심을 끌기도 했다.
최덕규 후보는 지난 2007년 선거에서도 1차투표에서 김병원 후보에 밀려 2위를 기록한 최원병 회장을 결선투표에서 지원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당시 최원병 회장이 최덕규 후보에게 ‘이번에 나를 밀어주면 다음에 당신을 회장으로 밀어주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기자는 직접 설명을 듣기 위해 여러 경로로 최덕규 후보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한편 최원병 회장 당선 직후 김병원 후보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로서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다”며 “앞으로 농협 정관에 대한 유권 해석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