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심슨에 뺨 맞고 라이더에 화풀이
▲ 위노나 라이더가 법정에서 검찰 측의 발언에 분노한 듯이 벌떡 일어나고 있다. 로이터 / 뉴시스 |
종종 스타들의 도벽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딘 마틴은 넥타이나 장갑을 훔치곤 했다고 고백했고, 헤디 라마 같은 경우는 슬리퍼 한 짝을 훔치다 걸려 컴백이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라마의 행동이 필요나 물건의 가치와 무관하게 훔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클렙토마니아(kleptomania)’, 즉 ‘병적 도벽’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위노나 라이더는 어떤 경우일까? 일단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2001년 12월 12일 수요일 오후 4시였다. 위노나 라이더는 베벌리힐스에 있는 ‘삭스 5번가(Saks Fifth Avenue)’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세 시간 만에 체포된다. 85달러짜리 양말부터 1595달러짜리 구찌 드레스까지 총 5500달러 상당의 물건을 계산하지 않고 가지고 나왔다는 혐의였다. 그녀가 도난 방지 태그를 물건에서 떼어내는 장면이 CCTV에 찍혔다고 했고 어느 점원은 그녀가 가방 속에 물건들을 쑤셔 넣는 걸 ‘본 것 같다’고 증언했다. 게다가 붙잡혔을 때 그녀의 가방엔 진통제가 있었는데 검사 측에 의하면 “불치병 환자에게 처방되는 양보다 더 많은 진통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보안 요원에 의해 경찰서로 간 라이더는 2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저녁 11시 40분에 풀려났다. 다음 날 라이더의 변호사 마크 제라고스(그는 스타들의 변호로 유명하다)는 기자회견에서 “백화점 측의 오해”라며 “고발이 취소될 것”이라 예상했다.
제라고스의 예상은 빗나갔다. 2002년 1월 11일로 재판 날짜가 확정됐고 LA 카운티 지방검사실에선 8명의 검사들로 이뤄진 라이더 전담 팀이 꾸려졌다. 사소한(?) 절도죄엔 유례가 없는 대응이었고 영국의 <가디언> 같은 저널들은 ‘재판 쇼’를 벌이고 있다고 빈정거렸으며, <LA타임스>는 “검사들은 거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끈기와 근성으로 위노나의 사건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고 사태를 진단했다. 2월 5일로 재판이 미뤄지는 동안 라이더는 어느새 중죄인이 되어 있었다. 2급 절도, 공공 기물 파손, 불법 약물 소지 등등. 라이더의 대변인은 “엄청나게 과장된 기소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맞섰지만 라이더의 오명은 점점 짙어졌다.
재판도 열리기 전에 위노나 라이더는 처벌받는 분위기였다. 개봉을 앞두고 있던 출연작 <미스터 디즈>(2002)의 예고편에선 그녀의 모습이 모두 삭제됐다. TV 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Politically Incorrect)>에 출연한 셸리 롱이라는 배우는 라이더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그녀의 도둑질은 도움을 구하는 절규”라던 셸리 롱은 “도둑질은 정신적 질환이다. 그것은 중독이며 버릇”이라고 단정했다. 웨스트 할리우드 씨어터에선 풍자극인 <내 이름은 위노나, 나는 좀도둑>의 막이 올랐다. 한편 LA 시내엔 “위노나를 석방하라(FREE WINONA)”라는 문구의 티셔츠가 팔리고 있었다.
2002년 6월 3일, 예심을 위해 위노나 라이더는 조용히 베벌리힐스 법정에 나타났다. 이때 사진기자들 틈에서 거칠게 떠밀리며 팔이 골절되었다. 3일 후 재개된 법정에서 검사 측은 2000년 5월과 2001년 11월에도 라이더의 절도 사실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판사는 신빙성이 없다며 검사의 주장이 배심원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지만, 속기록을 입수한 저널은 신속하게 이 사실을 공개했다.
2002년 10월 24일 남녀 각각 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증언은 이어졌다. 라이더가 점원에게 “내 어시스턴트가 돈을 지불하지 않았나요?”라며 “사실은 다음 영화 배역 연습 중”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점원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라이더를 체포한 백화점 보안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베벌리힐스에 사는 XX를 절도죄로 처넣고야 말겠어!” 90분에 달하는 CCTV 화면을 꼼꼼히 관찰한 12명의 배심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고, 이 순간 위노나 라이더는 법정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TV에선 정규 방송을 멈추고 이 광경과 함께 라이더의 판결 소식을 전했다.
480시간의 사회봉사, 약물 관련 카운슬링 받기, 3700달러의 벌금과 6355달러의 배상금, 3년의 보호 관찰 기간까지, 감옥에 가진 않았지만 라이더는 가혹한 처사였다. 변호사는 과거 라이더가 행했던 자선 활동을 거론하며 선처를 부탁했지만 판사는 “다시 물건을 훔치면 감옥에 보내겠다”는 말로 응수했다.
돌이켜보면 위노나 라이더 재판은 권력과 미디어와 대중이 합작해낸 느낌이 강하다. 여기엔 5년 전 OJ.심슨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던 캘리포니아 사법 당국의 꼼수가 작용했으며 “우린 단순히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 바란다. 그것이 이 재판의 목적”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검사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스타가 되려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한동안 ‘대형사건’에 목말랐던 대중은 거의 살인사건에 준하는 수준으로 라이더의 사례를 즐겼다.
한편 2003년 6월에 샌디에이고의 한 고등학교에선 위노나 라이더의 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그 제목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를 패러디한 <도벽: 삭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삭스 5번가 백화점에서 뮤지컬에 사용될 쇼핑백을 협찬했다는 후문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