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번’ 그에게도 ‘긴 터널’ 있었다
▲ 이대호는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일본 도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오릭스로부터 역대 일본 진출 한국 타자 중 최고 대우를 제안받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무척 고마웠다.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좋은 대우를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담이 컸다.”
오릭스와 첫 협상을 끝낸 이대호는 차분히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그도 그럴 게 이대호는 오릭스로부터 2년간 총액 7억 엔의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받은 터였다. 계약금 1억 5000만 엔에 순수연봉만 2억 엔에 달라는 매머드 계약이었다. 이대호가 옵션만 달성한다면 1억 5000만 엔을 덤으로 받을 수 있어 몸값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이대호보다 많은 몸값을 받는 이는 10명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무대에서 검증되지 않은 이대호가 이처럼 고액 연봉자가 된 이유는 그가 가진 가능성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대호는 그 가능성만을 믿고 살아온 선수였는지 모른다.
이대호는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대문야구장에서 축포가 터지며 프로야구가 개막한 해였다. 하지만, 이대호의 유년시절은 축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재가했고, 남은 건 이대호와 그의 형뿐이었다.
이대호는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할머니는 부산 팔도시장에서 된장과 채소를 팔았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아니 가난했다. 이대호는 한겨울에도 연탄을 때지 못했다. 150원하던 연탄값이 아까워서였다.
가난한 소년 이대호는 구김살 없이 컸다. 그의 말대로 가난은 그의 성장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이대호의 유일한 취미는 사직구장을 찾는 것이었다. 또래 소년들처럼 이대호도 사직구장에서 롯데 선수들을 응원했고, 파울볼을 줍기 위해 관중석을 헤집고 다녔다.
야구는 수영초교 3학년 때 처음 시작했다. 추신수 덕분이었다. 수영초교로 전학 온 추신수는 같은 반 급우였던 이대호를 야구부 감독에 소개했다. 그리고 이대호에게도 야구를 권했다. 추신수의 눈에 고교생처럼 큰 체격을 갖춘 이대호가 야구선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던 것.
역시 야구는 운명이었다. 이대호는 중학교에 진학하며 부산지역에서 추신수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로 거듭났다. 경남고에 진학했을 땐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
신일고 최재호 감독은 “마운드 위에서 위력적인 공을 던지다가도 타석에 서면 홈런을 ‘펑펑’ 치는 선수”로 고교시절 이대호를 기억했다.
사실이었다. 이대호는 고3 시절 전국대회에서 완봉승을 밥 먹듯이 했던 괴물 투수였다. 타석에서도 당시 고교 최고 투수였던 부산고 추신수를 상대로 홈런을 뽑아낼 만큼 강타자였다. 이대호는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김태균, 추신수와 힘을 모아 우승을 일궈냈다.
이대호는 2000년 6월에 열린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롯데의 지명을 받았다. 계약금은 2억 1000만 원. 그는 롯데에서 고난을 희망으로 바꿨다.
“처음엔 야구선수가 아닌 줄 알았다. 씨름 선수가 무슨 일로 야구장에 왔나 싶었다.” 롯데 박정태 타격코치는 이대호와의 첫 만남을 그렇게 표현했다. 192㎝, 92㎏의 당당한 체구였던 이대호를 다른 이들도 부러움 반, 우려 반으로 지켜봤다.
“타자였다면 훌륭한 체구였다. 하지만, 당시 이대호는 투수로 입단했다. 유연성과 민첩성이 뛰어나야 하는 투수로선 지나치게 큰 체격이었다. 그래서 이대호를 보고 부상을 걱정하는 이가 많았다.” KBS 이용철 해설위원의 말이다.
▲ 지난해 10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훈련 중인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승엽은 경북고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가장 촉망받는 투수 유망주였다. 하지만, 1995년 삼성 입단 후 타자로 전향해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홈런타자로 군림했다.
추신수도 마찬가지였다. 부산고 시절 시속 150㎞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며 대형투수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2000년 시애틀에 입단하며 타자로 변신해 대성공을 거뒀다.
미국야구재단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 선수의 투구 스피드와 배트 스피드는 거의 일치한다. 시속 145㎞ 이상의 강속구를 던진 경험이 있는 투수가 타자로 전향하면 시속 145㎞ 이상의 배트 스피드를 기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신체 매커니즘과 감각을 갖추고 있으면, 타자로 빠른 배트 스피드를 내는 것도 다른 야수 출신의 타자들보다 더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길은 험난했다. 백인천 감독과의 갈등이 문제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선호했던 백 감독은 상대적으로 체중이 많이 나가는 이대호가 못마땅했다. 백 감독은 “이 몸으론 야구선수가 되기 어렵다”며 이대호를 혹독하게 다그쳤다. 당시 롯데 관계자들은 사직구장에서 거구 이대호가 ‘쪼그려 뛰기’를 하며 힘들어하던 걸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백 감독의 훈련은 이대호와 맞지 않았다. 오른 무릎부상으로 수술까지 받았던 이대호는 무릎에 물이 차며 훈련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때 백 감독은 이대호를 트레이드하려 했다. 상대는 현대 송신영이었다.
백 감독은 “이대호에 자극을 주려 트레이드를 시도할 것처럼 모양새만 취했다”고 했다. 그러나 롯데 관계자들은 “백 감독의 트레이드 의지가 원체 강했지만, 이상구 단장(현 NC)이 ‘이대호는 절대 안 된다’며 거절하는 통에 겨우 트레이드를 막을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2004년 양상문 감독이 롯데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이대호의 인생에서 오랜만에 축포가 터진다. 양 감독은 ‘미완의 대기’였던 이대호를 계속 타석에 내보냈다. 삼진을 당하고, 병살을 쳐도 꾸준히 선발 출전시켰다.
다른 이들이 뒤에서 “이대호는 양 감독의 양아들”이라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 감독의 믿음에 이대호는 실력으로 화답했다. 2004년 프로 데뷔 첫 20홈런을 치고서 2006년엔 타율, 타점, 홈런 1위에 오르며 타격부문 3관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대호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로 우뚝 섰다. 이대호의 절정은 지난해였다. 이대호는 타율 3할6푼4리, 44홈런, 133타점으로 다시 한 번 타격 3관왕에 올랐다. 여기다 도루를 제외한 최다안타, 출루율, 장타율, 득점 1위에 오르며 사상 초유의 타격 7관왕에 등극했다. 9경기 연속 홈런은 차라리 덤이었다.
하지만, 이대호는 눈부신 성적을 내고도 롯데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롯데가 이대호가 요구한 연봉 7억 원을 거부하고 6억 3000만 원을 고집한 것이다. 이대호는 이에 반발해 한국야구위원회(KBO) 연봉조정신청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고, 야구계는 ‘과연 이대호의 연봉이 얼마면 적당한가’를 두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결과는 이대호의 패배였다. 이대호는 순순히 롯데가 제시한 6억 3000만 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석에선 “조정신청에선 졌지만, 명분에선 이겼다”며 “때를 기다리면 이번 패배를 되갚을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그날이 왔다. 올 시즌이 끝나고 롯데는 이대호를 잡으려고 100억 원을 베팅했다. 하지만, 이대호는 롯데의 손을 잡지 않았다. 이대호를 잘 아는 이들은 “롯데가 더 많은 돈을 베팅했어도 이대호는 롯데에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연봉조정신청 다툼에서 이대호가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이대호는 “그때의 일은 모두 잊었다”고 말했다. 그보단 꿈을 좇아 일본행을 결심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껏 많은 선배가 일본무대에 도전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도 일본에서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도전엔 실패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도전조차 하지 못한다면 후회만 남을 뿐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일본 도전을 결심했다.”
이대호의 도전을 바라보는 롯데의 심정은 착잡하다. 당장 내년부터 팀 타격 저하가 예상된다. 이대호를 보려고 야구장을 찾던 관중도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 관계자는 “2년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말로 이대호의 빠른 복귀를 염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모범생’ 이대호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 속정만큼은 최고라예
이대호는 무뚝뚝한 사내다. 취재진과 만나도 별 말이 없다. 하지만, 의리와 속정만은 최고다. 지금의 아내 유혜정 씨와는 2002년부터 사귀었다. 유 씨는 유치원 교사였다. 무명의 이대호와 만나 어려운 시절을 함께 버텼다. 2006년부터 이대호가 시쳇말로 ‘뜨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선 “이대호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대호에게 다른 여성을 만나라고 조언한 이도 있었다. 스타가 됐으니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연인을 찾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대호는 변하지 않았다. 되레 두 사람의 사랑은 더 돈독해졌고, 결혼까지 골인했다.
이대호의 동료들은 “총각시절 이대호는 술집에 가도 절대 여자를 옆에 앉히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며 “결혼한 이후에도 집과 야구장을 오가는 게 전부인 모범생”이라고 평가한다.
모범적 생활을 해서일까. 이대호는 과체중 논란에도 지금껏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있다. 이대호의 일본 무대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도 가정을 중시하는 안정된 생활 태도 때문이다.
이대호는 일본에서 특별히 도전하고 싶은 기록은 없다고 했다. 누구를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단다. 그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일본 무대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는 게 유일한 목표라고 했다.
“얼마나 홈런을 칠지 모르겠다. 일본 프로야구가 우리보다 수준이 높으니 한국에 있을 때보다 홈런 개수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어디서나 다 똑같다. 흘린 땀방울만큼 성적이 나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본 무대에 적응하려 노력한다면 2년 이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대호는 아직 젊다. 내년에 서른 살이다. 앞으로도 그의 인생엔 수많은 축포가 터질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강타자 이대호가 일본야구를 정벌하길 많은 이가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대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오릭스 홈구장 교세라돔을 사직구장처럼 열광적으로 만들도록 하겠다. 내년시즌 한국 팬들이 교세라돔을 찾았을 때 ‘이대호’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대호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의 이름을 부끄러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동]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 속정만큼은 최고라예
이대호는 무뚝뚝한 사내다. 취재진과 만나도 별 말이 없다. 하지만, 의리와 속정만은 최고다. 지금의 아내 유혜정 씨와는 2002년부터 사귀었다. 유 씨는 유치원 교사였다. 무명의 이대호와 만나 어려운 시절을 함께 버텼다. 2006년부터 이대호가 시쳇말로 ‘뜨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선 “이대호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대호에게 다른 여성을 만나라고 조언한 이도 있었다. 스타가 됐으니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연인을 찾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대호는 변하지 않았다. 되레 두 사람의 사랑은 더 돈독해졌고, 결혼까지 골인했다.
이대호의 동료들은 “총각시절 이대호는 술집에 가도 절대 여자를 옆에 앉히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며 “결혼한 이후에도 집과 야구장을 오가는 게 전부인 모범생”이라고 평가한다.
모범적 생활을 해서일까. 이대호는 과체중 논란에도 지금껏 큰 부상을 당하지 않고 있다. 이대호의 일본 무대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도 가정을 중시하는 안정된 생활 태도 때문이다.
이대호는 일본에서 특별히 도전하고 싶은 기록은 없다고 했다. 누구를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단다. 그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일본 무대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는 게 유일한 목표라고 했다.
“얼마나 홈런을 칠지 모르겠다. 일본 프로야구가 우리보다 수준이 높으니 한국에 있을 때보다 홈런 개수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어디서나 다 똑같다. 흘린 땀방울만큼 성적이 나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본 무대에 적응하려 노력한다면 2년 이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대호는 아직 젊다. 내년에 서른 살이다. 앞으로도 그의 인생엔 수많은 축포가 터질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강타자 이대호가 일본야구를 정벌하길 많은 이가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대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오릭스 홈구장 교세라돔을 사직구장처럼 열광적으로 만들도록 하겠다. 내년시즌 한국 팬들이 교세라돔을 찾았을 때 ‘이대호’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대호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의 이름을 부끄러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