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까지 달구고 떠난 사람…
▲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엄수된 영결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들어서는 모습. 그의 영결식에는 영하의 추위를 뚫고 찾아온 조문객 6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철강인 박태준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 현장. 포항 영일만 백사장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나란히 섰다. 테이블을 덮고 있는 천에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라는 사명(社名)이 선명하게 써 있었다. 세 사람은 테이블 위에 있는 발파 버튼을 동시에 힘껏 눌렀다. 발파음에 이어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착공식을 거행한 지 3년 후인 1973년 6월 9일 용광로에서 쇳물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 달 뒤 1기 고로가 완공됐다.
여러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가 철강산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며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를 설립한 지 43년 만인 지난 3분기 포스코의 자산은 77조 9347억 400만 원. 설립 당시 16억 원이던 것에서 4만 5000배가량 늘어났다. 이 같은 성장은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포스코와 박태준 명예회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68년 설립 때부터 지난 13일 별세할 때까지 박 명예회장은 CEO(최고경영자)로서, 명예회장으로서 포스코에 온몸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코 임직원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국민들로부터 포스코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포스코가 설립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려 했으나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대일청구권 자금’을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의 고통에 대한 보상금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인 데다 이 자금은 당초 농업분야에만 쓰도록 계획한 터라 철강회사를 설립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렵사리 일이 성사된 후 박 명예회장이 직원들에게 한 말은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
박 전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대표하는 ‘우향우정신’은 여기서 비롯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에 박 명예회장을 두고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 설립 6개월 만에 흑자를 만들어냈고 설립 25년 만에 연산 조강 2100만 톤을 달성했다.
박 명예회장이 이뤄낸 성과는 ‘철강왕’이라 불리는 미국의 앤드류 카네기가 이뤄낸 ‘35년간 연산 조강 1000만 톤’의 성과보다 뛰어나다. 시대적 배경과 기술에서 차이가 있지만 성과를 놓고 보면 박 명예회장 역시 ‘철강왕’이라 불려 마땅하다. 물론 이러한 성과를 혼자 해낸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국민들의 희생과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1973년 6월 9일 포스코 1기 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만세 부르는 박태준 사장(가운데). 아래는 포항제철 재직 당시 자주관리 특강에 나선 모습과 현장 방문 모습. |
1927년 음력 9월 29일 일제강점기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던 때 궁핍한 어촌마을인 경남 동래군 장안면 임량리(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남편 박봉관과 아내 김소순 사이에서 첫 아들이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얻은 아들의 이름을 클 태(泰) 준걸 준(俊)을 써 ‘태준’이라 지었다. ‘크고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의미였다.
1933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간 어린 태준은 공학도의 꿈을 키웠다.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귀국,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6기생으로 들어갔다. 공학도의 꿈을 버리고 군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곳에서 사관생도 박태준은 평생 든든한 지원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이 탄도학 교관으로 있었던 것이다.
군인 박태준은 한국전쟁에서 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공으로 1954년 금성화랑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육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제지간으로 만난 박 전 대통령과 박 명예회장은 차차 끈끈한 군인 선후배 사이로 발전했다. 박 명예회장이 “박통이 사석에서는 나를 ‘박 첨지’라고 부를 정도로 친했다”고 밝힐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했다. 박 명예회장이 수십 년 동안 살았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자택도 박 전 대통령이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은 5·16 쿠데타 때 혁명동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유가 있다. ‘공신’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의 믿음 때문이었다. “혁명이 실패하면 임자라도 살아남아 군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게 박 전 대통령의 당부였다. 또 만약 쿠데타가 실패해 잘못된다면 남은 식솔을 박 명예회장에게 맡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후 육군 대령 박태준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맡으며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임을 증명했다.
1963년 군인 박태준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면서 마침내 군복을 벗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전두환 씨와도 인연이 있다. 1954년 박 명예회장은 육사를 진해에서 서울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육사 교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20일 부인 장옥자 씨와 결혼했다. 이때 전두환은 육사 생도(11기)였다. 박 명예회장과 전 씨는 같은 연대에서 참모장과 중대장으로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10·26과 12·12를 거치며 모든 권력이 전 씨에게 쏠리자 박 명예회장은 전 씨를 꽤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후배이자 부하였던 사람이 최고권력자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은 신군부가 주축이 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했고 신군부의 집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서서히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 김대중 정권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고 박태준 명예회장.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며 4개월 만에 낙마했다. 정치인으로선 영광과 오욕을 다 맛본 셈이다. |
1990년 1월 5일 비즈니스와 관련해 유럽 등 해외출장 중이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대통령의 부름이 있다는 청와대의 연락을 여러 차례 받았다. 박 명예회장은 내심 고까웠을 것이다. 대통령 노태우는 박 명예회장이 육사 교무처장 시절 육사 생도였다.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위계질서가 엄격한 육군 후배였다. 그러나 해외출장을 이유로 청와대의 연락을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였다.
새해 벽두 박 명예회장이 맡아야 할 직책은 집권 민정당의 대표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였다. 귀국한 다음 날인 1월 6일 조간신문들을 일제히 ‘박태준 포스코 회장이 민정당의 새 대표에 취임한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박 명예회장에게 정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1961년 이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맡은 바 있고 1980년 국보위에도 참여했다. 1981년 민정당의 비례대표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88년에도 민정당 비례대표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14대, 15대 연이어 당선됐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에게 정치는 포스코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 “포항제철을 외풍에서 지킬 방패막이가 필요해 정치권에 뛰어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1981년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에도 포스코 회장으로서 사업과 제철소 확장, 경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광양 4기 건설을 앞두고 민정당 대표로 취임한 박 명예회장은 민정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떠오르며 일약 정계의 거목이 됐다. 그리고 1997년엔 우리나라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른바 ‘DJT연합’. 박 명예회장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연대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정치인 박태준은 누가 뭐라 해도 1990년대 우리나라 정계 거물이자 실세였다. 그러나 정치인 박태준의 인생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욕의 세월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정당 대표직을 수락하지 않고 포스코 회장으로 계속 경제인으로 남아 있었던 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민정당 대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 2002월드컵추진국회의원연맹 회장, 국무총리 등 박 명예회장이 정계에 남긴 족적은 화려하다. 경력만 놓고 보면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셈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 민정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3당합당을 맞이한 것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노태우·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마뜩찮게 생각하던 박 명예회장은 특히 YS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을 1992년 탈당했다. 이듬해인 1993년, 포스코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실시됐고 박 전 회장 본인과 가족은 물론 측근들까지 비자금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박 명예회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고 포스코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했다. 쫓기듯 일본으로 건너간 박 명예회장은 그렇게 4년의 시간을 보냈다.
절치부심의 세월이 지나고 박 명예회장은 1997년 포항 북구 보궐선거에서 당선하며 보란 듯이 정계에 복귀했다.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박 명예회장은 ‘재벌개혁’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당시 큰 화제가 된 ‘빅딜’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명예회장이 맡은 분야는 자동차. 박 명예회장이 현대차, 삼성차, 기아차, 대우차 간 삼각 기업 결합 방안을 연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000년 박 명예회장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국무총리에 올랐다. 2000년은 또 포스코의 민영화가 완료된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여권이 패하면서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총리 취임 4개월 만에 사임, ‘단명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정치권에서 멀어졌다.
# 자연인 박태준
2011년 12월 13일 작가 조정래는 지난 2007년 위인전 <박태준>과 2009년 산문집 <황홀한 글감옥>을 통해 박태준 명예회장을 극찬한 바 있다. 대하소설 <한강>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 박태준 명예회장을 우러렀다.
작가는 <박태준> 출판기념회에서 “그분이 이룬 일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덕성과 진실성으로 나를 감동시켰다”며 생존인물을 ‘위인’으로 칭송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작가로서 낯 뜨거울 정도의 칭찬”이라며 “특히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씨의 언행과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반대로 “조정래 작가이기에 신뢰가 간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생존인물을 ‘위인’으로 삼은 것은 이례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박 명예회장이 숨을 거둔 후 유족 측은 “박 명예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본인 명의의 집도 없고 주식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 “큰딸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장례는 국장, 국민장 다음으로 예우를 갖춰 거행하는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실천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이제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취는 많은 사람들 곁에 남아 있을 듯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