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도둑맞은 건 ‘인생’이었다
▲ 80년대를 주름잡던 청춘스타 로브 로우. 1988년 그의 섹스비디오가 유출되면서 인기도 명예도 한순간에 추락했다. 현재는 배우로 재기해 다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
19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할리우드 아이돌 스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로브 로우라는 배우를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젊은 관객들에겐 미드나 <오스틴 파워>(1999)의 안대 쓰고 나온 ‘넘버 투’ 정도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1980년대의 로브 로우는 톰 크루즈보다 유명했고 나스타샤 킨스키, 데미 무어 그리고 모나코의 스테파니 공주와 연인 관계였으며, ‘제2의 알랭 들롱’으로 불리던 스타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1988년 이전의 일이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타를 꿈꾸었던 로브 로우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꿈을 이루었다. 19세 때 만난 코폴라 감독의 <아웃사이더>(1983)를 시작으로, <클래스>(1983)에선 대선배 재클린 비셋을 상대로 로맨스 연기를 선보였다. 그를 섹스 심벌로 만든 영화는 <옥스포드 블루스>(1984). 또한 <세인트 엘모의 열정>(1985)을 통해 이른바 ‘브랫 팩’(Brat Pack)의 일원이 되었다. ‘브랫 팩’은 데미 무어, 앤드류 매카시, 주드 넬슨, 앨리 시디,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등 198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스타들을 일컫는 말. 이후 로브 로우는 <뉴햄프셔 호텔>(1984)에선 나스타샤 킨스키, <어젯밤에 생긴 일>(1986)에선 데미 무어, <영 블러드>(1986)에선 신시아 깁의 파트너가 돼 청춘스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그에게 연기 이외에 또 하나의 활동 분야가 있었다면 그건 정치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한때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대표적인 민주당 지지자로 명성을 굳혔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걸 좋아했던 그는 마치 정치를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상원의원 로브 로우’라고 농담처럼 부를 정도였으며, 민주당의 모든 정치 관련 파티에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브 로우가 가장 친한 정치인은 한때 제인 폰다의 남편이었던 톰 헤이든이었다. 헤이든은 마이클 듀카키스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애틀랜타 전당 대회에 로브 로우를 초대했다. 1988년 6월 17일 야구광이었던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캠코더에 담은 뒤 그날 저녁 미디어 제왕인 테드 터너의 후원 파티에 참석했고, ‘브랫 팩’ 친구들인 앨리 시디와 주드 넬슨 등을 데리고 애틀랜타 지역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클럽 리오’에 들렀다.
그곳에서 로우에게 접근한 몇몇 여성들 중엔 조지아의 어느 헤어 살롱에서 경리로 일한다는 타라 시버트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시스턴트라며 잔 파슨스라는 여성도 소개했다. 로우는 그들이 맘에 들었고 밤에 자신이 묵고 있는 애틀랜타 힐튼 호텔로 오라며 방 번호를 알려주었다. 로우는 두 여성과 섹스를 즐겼고 그것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았다. 그 테이프엔 한 달 전 프랑스에서 ‘남자 둘, 여자 하나’로 즐겼던 스리섬 섹스도 담겨 있었다.
격렬한 섹스 후에 로우는 곯아 떨어졌고, 깨어 보니 두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로우의 지갑에서 200달러가 없어졌고 비디오테이프도 사라졌다. 로우는 신고하지 않았다. 듀카키스의 정치적 이미지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몰랐다. 그날 밤 섹스를 나누었던 잔 파슨스가 16세의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클럽이 들어갈 때 일일이 신분증 검사를 했기에 그 안에 미성년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1주일 뒤 파슨스의 어머니는 딸의 방에서 테이프를 발견했고 며칠 후 로우와 변호사는 그녀와 접촉한다. 로우는 3만 5000달러로 입막음을 하려 했지만 파슨스의 엄마는 법원으로 달려갔다. 대중 스타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미성년자를 유혹했고 포르노그래피를 찍으려 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FBI와 경찰은 로우의 집을 압수 수색했다. 더 이상의 섹스 테이프는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에 유죄가 인정된다면 20년형에 처해질 중범죄였지만 사법부는 로우에게 20시간의 사회봉사와 2년의 보호 관찰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배우 경력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그는 더 이상 스타가 아니었다. 로우는 “거친 장난이었을 뿐”이라며 오히려 “나를 정말 화나게 하는 건 유럽에선 이런 식으로 나를 못살게 굴지 않는다는 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섹스 스캔들에 휘말렸어? 정말? 대단한데!”라며 항변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는 학교에서 마약에 대한 위험성을 각성시키는 강의를 통해 사회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교사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우리 아이들 앞에서 로브 로우가 도덕에 대한 얘기를 하게 허락하는 건, 유태인의 결혼식에 히틀러를 초청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건 수없이 복제된 그의 테이프가 암시장에서 거의 100만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로브 로우는 섹스 비디오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1990년대는 그에게 암흑기가 되었다.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이할 30대에 그는 젊은 날의 실수로 인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사건이 대중들로부터 거의 잊힐 무렵,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벗겨져나갔다. 오직 남은 것은 나의 과거뿐이다. 나는 내 과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내가 항상 원했던 그런 삶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때 알코올 중독으로 갱생원을 드나들었던 그가 배우로서 다시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1991년에 결혼해 지금까지 20년 동안 함께하고 있는 아내 셰릴 버코프 덕분이다.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스캔들의 주인공은 현재 건실한 중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