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보 먹통 MB와는 소통 이번에도 면죄받나
▲ 원세훈 국정원장이 12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북한의 동향을 면밀하게 추적, 어떠한 사태에도 즉각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조기 경보체제를 강화하고 안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나가는 데 힘 쓰겠다.”
지난 2009년 2월 제30대 국가정보원장에 취임 당시 원세훈 원장이 밝힌 포부다. 하지만 원세훈호 출범 2년 10개월이 지난 현재, 원 원장의 야심찬 포부는 무색해졌다. 반복되는 사고와 구설로 인해 국정원은 존립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나올 정도로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북한 원수 사망이라는 초대형 사건을 감지하지 못한 것과 관련, 국정원의 ‘한심한’ 수준을 실감한 국민들의 입에서는 ‘동네정보원’ ‘걱정원’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포함해 원 원장 체제 출범 후 발생한 국정원의 잦은 사고는 정보기관의 생리와 전문성을 무시한 원 원장의 아마추어리즘과 과도한 성과주의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원 원장의 아마추어리즘은 그의 막무가내식 조직개편 및 인사단행에서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원세훈 원장 체제 출범 직후 현직 부서장급 간부 대부분이 교체됐으며 1급 간부 상당수도 대기발령이 이뤄지는 등 국정원은 인사태풍으로 술렁거렸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지난 2009년 가을 원 원장이 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대북 업무에 주력하던 3차장 산하 조직의 기능을 산업 및 과학 정보 수집과 사이버 보안 등 특수업무 위주로 개편한 것이었다. 또 해외업무를 담당하던 1차장실은 대북업무를 병행하는 한편 산업 스파이 관련 국제범죄 정보 등에 주력하도록 했다.
정치권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원세훈 식 조직개편이 대북 정보력 약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박선영 의원은 “원래 국정원 1차장이 해외, 2차장이 국내, 3차장이 대북 업무를 맡았는데 대북을 1차장에다 엎어버려 곁가지 살림을 하게 만들었다”며 “대북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 대부분이 대기발령나거나 국정원 수뇌부 전원이 비전문가로 임명됐다”고 비판했다.
국정원 조직개편 후 대북업무 약화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고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 사건과 리비아 사건 국정원의 과실사고까지 이어지자 올 4월 이 대통령은 국정원 제1차장에 전재만 주 중국대사관 공사를, 제3차장에 이종명 합동참모본부 군사기획부장을 내정함으로써 쇄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국정원 안팎에서는 이 대통령이 원 원장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1차장과 3차장을 교체했다는 얘기가 나돌았으며, 수족이 잘린 대북파트에 대한 복구 의지는 아예 없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특히 국정원장 아래 차장 세 명이 외교관, 총리실, 군 출신으로 대체되는 등 정보 비전문가가 국정원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원 원장에게 독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당시 인사와 관련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원 원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는 여전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원 원장과 가까운 민병환 2차장은 물론 서울시 출신인 목영만 기조실장이 유임된 것만 봐도 그랬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원 원장 체제하에서 이뤄진 조직개편과 관련해 가장 심각하게 지적되는 문제는 휴민트의 붕괴다. 정보원 등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뜻하는 휴민트는 단순 첩보도 고급정보로 재생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이번 김 위원장의 사망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도 휴민트 체제의 붕괴 때문이라는 일각의 지적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복수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장 또는 핵심관계자와 직접 접촉을 함으로 정보를 빼내는 휴민트는 요원의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최악의 위험이 따르지만 대북접촉 창구에서 사실상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일명 ‘스파이’를 활용하는 일이 포함되는데 외부에서 절대로 알 수 없는 북한의 동향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비공식채널인 셈이다.
▲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한 탈북자는 “북한이 남한 정세 파악과 주요인물 포섭을 위해 ‘간첩’을 보내듯 우리 정부도 그런 작업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남한에서 외부조직 깊숙이 직접 침투하거나 첩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 ‘제임스 본드’가 사라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원 원장이 인적정보망 구축에 대한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책임이 있다. 국정원에서 북한 동향을 우리 같은 탈북자를 통해 전해 듣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꼬집었다.
국회 정보위의 한 관계자도 “현재는 북한 권력에 닿을 수 있는 인물조차 거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북한과 이어질 수 있는 채널이 막혔다고 본다. 북한에서 공개한 사진이나 미국 등 타국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는 수준이라니…. 얼마 전까지도 국정원은 김정일이 몇 년은 더 생존할 것으로 봤다니 말 다했지 않나. 대북 정보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김정은 체제에서의 급변사태와 대남도발에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건지…”라며 답답함을 표했다.
또 원 원장의 막무가내식 인사개편은 국정원의 과실로 이어지며 원 원장의 경질론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사실 국정원 내부에서조차 원 원장 부임 이후 과도한 물갈이로 베테랑 요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한 것이 중대한 문제로 지적돼 왔다. “그간 비공개적으로 북한 정보를 취합해오던 베테랑 대북전문요원들은 다른 곳으로 전출됐다. 각 요원들이 전문분야를 넘은 업무까지 담당하거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현장에 투입하다보니 하수들이나 저지르는 실수가 빈발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원 원장 체제 출범 후 정보유출로 인한 민망한 사고와 어설픈 뒷수습은 나라망신을 떠나 세계첩보사에도 유례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DJ 정부 때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이강래 의원은 “현장 요원이 하는 일은 ‘은밀성’이 제일 중요한데 전부 노출되는 걸 보면 국정원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가 드러난다. 국정원이 행정기관처럼 움직인 결과”라고 꼬집었다. 정보유출과 관련해서는 여당에서조차 이미 “2008년 김정일 위원장이 쓰러지고 난 뒤에 왼손으로 칫솔질이 가능해졌다는 등의 정보를 국정원에서 계속 흘리는 바람에 북한 핵심부에 있던 정보라인이 모두 제거됐다”고 혀를 찼을 정도다.
한편 이 와중에 정두언 의원이 이번 사태가 MB정부 집권 초 정치탄압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 정부 출범 전 소위 대북 휴민트 체제가 와해되었다.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이들이 이명박 음해 세력이었다는 거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번 사태를 ‘국정농단세력이 벌인 일들’로 규정한 것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제2차관 등 MB 측근들이 당시 서훈 전 국정원 3차장 및 3차장실을 ‘제거’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서 전 차장은 북한 장성택 부장과 밤새 통음을 할 정도로 대북관계의 핵심인물로 꼽힌다. 청와대는 “대응할 필요를 못느낀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 의원의 주장은 “대북라인 핵심인사들을 좌파세력으로 몰아 옷을 벗김으로써 국정원 휴민트 체제를 와해시켰다”는 정치권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원 원장의 목을 더욱 옭죄고 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원 원장 책임만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대북라인의 붕괴는 이미 지난 정권부터 이뤄진 일이라는 얘기다. 박선영 의원은 “지난 두 번의 정권을 거치면서 명예퇴직 강제해직 등으로 대북라인이 무너졌다. 평생을 대북업무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DJ정권 초반에 600여 명을 다 잘라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보기관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도 “DJ정부 초기 대공 전문가들을 무더기로 옷을 벗겼다. 이때 인적첩보원, 즉 스파이 조직이 다 무너졌다. 그때부터 이미 스파이 양성부서는 폐업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지금 휴민트 조직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조직에 직접 투입할 수 있는 고급 스파이는 양성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단기간에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찌 국정원 시스템의 책임을 원 원장에게만 돌리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정원장에 오른 지 2년 10개월 만에 원 원장은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취임 후 국정원 내 SD(이상득)라인을 제거하는 인사개편을 단행하면서 소위 ‘형님라인’들에 의한 암투설에도 적잖이 시달렸던 그지만 이번엔 사태가 더욱 심각해 보인다. 특히 이미 수차례 원세훈 원장에 대한 경질론이 제기됐음에도 그를 싸고돌았던 이명박 대통령이 끝까지 ‘면죄부’를 줄지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 원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청 인맥 핵심으로 꼽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딴건 몰라도 ‘그분’ 맘은 척!
원세훈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김정일 사망 인지 실패라는 국가적인 재앙수준의 실수를 한 것을 두고 책임론이 비등하고 있다. 특히 원 원장의 경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정보 분야의 비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국정원장이 외교-안보-국방이라는 핵심국정분야를 다루는 직책인 데다가 중대한 남북문제가 산적되어 있는 상황에서 관료 출신인 그에게 정보기관의 수장을 맡기기에는 불안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는 원 원장 발탁배경과 관련, “업무역량과 대통령 국정철학 이해도, 추진력”이라 설명했는데 그간 군 출신과 법조인 출신이 독식하다시피 한 국정원장에 관료 출신인 원 원장을 임명한 것은 상당한 파격이자 모험이었다.
관료 출신인 원 원장이 국정원장으로 기용된 이유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깊은 인연과 신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대통령의 서울시청 인맥 핵심으로 꼽히는 그는 2007년 10월 당시 이명박 후보의 정책분야 상근특보를 맡으면서 MB맨으로 입지를 굳혔다. 전직 국정원 출신 인사는 “위 아래 할 것 없이 한번 꽂힌 사람을 향한 충성과 믿음이 대단했다. 또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곧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독단적이고 편협하다는 힐난도 있었지만 이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많아 잘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매주 금요일 임태희 대통령실장 같은 최측근도 제외된 자리에서 이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원 원장의 임명을 두고 일각에서 업무적격성보다는 충성도와 입맛에 맞춰서 한 인사라는 비판이 일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원 원장 경질을 요구하고 있는 정치권은 전문성과 업무적합성을 배제한 이명박식 인사가 이번 사태의 근원이라는 지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독대정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대통령만을 위한’ 국정원으로 변질된 것이 화근이라는 얘기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