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짱도 안풍도 걷어찬 ‘명품 자존심’ 컴백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그의 장점만 보면 왜 역대 정권이 경제부처 수장에 그의 이름을 매번 올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마지막으로 임명직 공직에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김 전 수석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윗사람들이 그를 기용하고 싶어도 주변부에서 매번 ‘반대표’를 던진 이유가 자신의 주장이 너무 강해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위원장도 그를 비대위로 모셔올 때 바로 이 점을 고민했을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박 위원장이 김 전 수석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비대위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뜨거운 감자’ 김종인 전 수석의 마지막 공직 도전기, 그 이면을 따라가 봤다.
“김종인 전 경제수석이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정도가 들어와야 조금 기대를 걸어볼 수 있지 않겠느냐.”
한나라당에서 쇄신운동을 주도해온 한 소장파 의원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한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는 기준으로 김 전 수석의 기용을 얘기했었다. 그만큼 김 전 수석은 한나라당 소장파에게는 정책이나 현장정치에서 일종의 등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원희룡 의원은 “김종인 박사 참여는 최상의 카드다. 그분이 밀고 나가는 길이라면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실 정치권에서는 김 전 수석이 박근혜 위원장과 전격적으로 손을 잡은 것을 두고 의외라는 시각이 많다. 그는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박 위원장에 대해 “(안철수 원장이 정치권 진입을 미적거리는 것에 대해) 신비주의 정치인은 박근혜 한 사람으로 족하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그동안 콘텐츠 개발에 공을 들여온 박 위원장으로서는 상당히 아픈 지적이기도 하다.
▲ 12월 30일 비대위에서 대화하는 김종인 위원(왼쪽)과 박근혜 위원장. 김종인 카드를 선택한 박 위원장 복심에 대한 추측이 무성하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친박계 사정을 잘 아는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김광두 교수는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한동안 최측근 그룹에서 밀려났으나 학자그룹을 중심으로 꾸준히 네트워크를 강화하다가 지난 2010년 12월 말 박근혜 대권조직의 공식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을 출범시키면서 화려하게 전면으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경제분야에 대해 조언하던 3인방 가운데 김 교수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전제하면서 “그런데 동시에 김 전 수석의 입지가 좀 애매해졌다. 김광두 교수가 공조직인 싱크탱크를 이끌고 이한구 의원은 대선공약 개발로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됐는데 김 전 수석만 롤(역할)이 불분명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국가미래연구원 출범 과정에서 김 전 수석이 추천한 제자와 지인들이 대거 탈락한 것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때부터 자존심 강한 김 전 수석도 박 위원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박 전 대표의 대권행보에도 비판적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친박계 주변에서는 “김종인 전 수석은 한물간 사람 아니냐. 그런 사람을 중용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차제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라는 말들도 나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친박계 일각에서는 김 전 수석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 않게 나왔을까. 여기에는 김종인 전 수석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고집-원칙의 DNA’가 친박이라는 조직과 융화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는 정치인 자문인사들 가운데 자존심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센 사람이다. 김 전 수석은 최근 안철수 원장과 멀어지게 된 계기에 대해 “나는 멘토로서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는데 (멘티가) 들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얘기 안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멀어진 계기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2001년 노 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일 때 김 전 수석을 보자고 해서 만났다고 한다. 김 전 수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때 나는 노 장관에 대해 ‘이런 사람이 하면 나라가 좀 바뀔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서민적으로 사고하고, 재계의 힘이 세지는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더라. 그래서 ‘도와 주마’ 하고 약속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기고 후보가 되고 나서 몇 마디 충고를 했는데, 얼굴이 확 굳어지더라. 이미 구름 위에 떠 있었던 거다. 그 뒤 몇 번 더 실망하고는 기대를 접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건 뒤 그는 자신을 내쳤다고 생각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왜 실패했나. 준비 안 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3년 반 동안 로드맵만 그리다가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나”라며 부정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김 전 수석은 자신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주군’(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충성을 다했다. 자신의 경제개혁에 대한 권력의지를 정치인을 통해 오롯이 관철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런 고집과 원칙은 권력자에게는 언제나 불편한 것이었다. 김 전 수석은 보수-진보를 넘나들며 자신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줄 때만 움직인다는 평가 때문에 권력자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능력을 마지막으로 알아 본 ‘주군’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 때 대선공약인 아파트 200만호 건설 때문에 투기 붐이 일면서 부동산 값이 폭등을 거듭, 민심이 험악해졌다. 궁지에 몰린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초 당시 야인이던 김종인 전 수석을 급히 불렀다. 노 대통령은 경제에 관해 전권을 맡길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이때 대통령이 김 전 수석에게 각서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김 전 수석은 노 대통령에게 “주가가 반 토막 나 아우성이 나도 관여하지 않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한 뒤에야 김 전 수석은 경제총괄이 되어 대기업에 무차별 칼을 휘둘렀다. 부동산을 안정시키기 위해 5대 대기업에게 비업무용 토지를 모두 팔라고 윽박질렀다. 안하면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알겠다고 경고했다.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30대 대기업들까지 알아서 경쟁적으로 팔았다. 그 결과 당초 목표치의 두 배에 달하는 비업무용 토지들이 팔렸고, 부동산투기는 진정됐다.
당시 ‘고집 센 경제수석’으로 불린 그는 이밖에 재벌의 업종전문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도입 등 대기업 견제 정책을 두루 관철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의 관운은 여기에서 끝이었다.
그렇다면 관직에서 물러난 1992년 이후 거의 20년 만에 다시 현실정치의 최전선으로 불러낸 박근혜 위원장의 복심은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박 위원장이 ‘뻣뻣한’ 김 전 수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상당한 재량권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김 전 수석 또한 평소 그의 성향상 박 전 대표에게 ‘각서’에 준하는 다짐을 단단히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그가 비대위 이름으로 공천과 인적 쇄신을 공격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박 위원장이 그를 ‘모셔오면서’ 준 일정지분의 공천권과 차기 정권 요직 보장에 근거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종인 카드는 박 위원장이 현재의 대선정국을 일반적인 관측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놓은 일종의 도박이라는 시각이 있다. 안철수 바람으로 제로베이스에서 대권을 검토하던 박 위원장이 한때 멀어졌던 김종인 카드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시에는 고집불통 김 전 수석을 컨트롤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지만 안철수 바람으로 지지율이 정체-하락을 거듭하는 전시상황으로 접어들면서 공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종인 카드는 박 전 대표에게도 위험한 도박이다. 김 전 수석의 칼같은 성격으로 볼 때 향후 양측이 갈등을 빚다가 수가 틀리면 그는 언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대위=김종인’이라는 등식이 깨지면서 박 위원장의 대권도전에도 치명상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박 위원장이 ‘김종인’이라는 칼로 친이-친박 간 계파 갈등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얽힌 정글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 전 수석은 지금까지 자기정치를 하지 않는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 형 정치인이다(11-12-14-17대 비례대표 4선의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 소신과 정책에 목숨을 걸 뿐 자신의 세력 확장이나 입신을 위해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적 쇄신 과정에서 계파 간 치열한 이해관계가 맞물릴 때 김 전 수석의 무채색 정치 스타일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특히 김 전 수석은 역대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계속 수행하면서 축적한 그만의 권력운용 노하우로 박근혜 비대위를 헤쳐 나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여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도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용은 박근혜 위원장의 대권 로드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인 카드는 ‘수구 보수’ 이미지로 비쳐지는 박근혜를 ‘부담 없이’ 좌로 이동시키는 데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보수-진보 정권을 두루 경험한 김 전 수석의 정책이라면 양측 모두의 이념적 저항을 덜 받을 수 있고 거부감도 희석될 것이란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김종인 카드는 박 위원장이 올해 대선 전략을 어떻게 짜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단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김종인 전 수석이 박근혜 위원장과 “사이좋게” 대선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김종인 걸어온 길
재벌들 “입각 막자” 수군수군, 얼마나 겁났으면…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자다. 꼿꼿한 원칙주의자였던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그 역시 타협을 싫어하는 딸깍발이 선비형이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졸업한 후 1964년 독일 뮌스터대로 유학, 그곳에서 재정학을 전공해서 1972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복지와 분배를 중시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일정정도 허용하는 ‘계획경제학자’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의 경제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향후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핵심 포인트는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대북정책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이다. 남북문제는 결국 경제문제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북한을 지원해줘 경제통합을 서둘러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경제수석으로 재직할 때 재벌 개혁에 앞장서 많은 모함을 받기도 했다. 당시 증권가에는 ‘재벌그룹들이 그의 입각을 막기 위해 정치권 실세에게 총력 로비를 폈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 그의 후임 경제수석인 이진설 전 건설부 장관이 사촌매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를 했던 박봉환 전 동자부 장관이 자형으로 한 집안에서 세 명의 경제수석급 관료를 배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김재익 전 경제수석이 중매를 해서 35세로 늦게 결혼했다. 부인은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김미경 씨. 장인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장인의 형이 재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다. 처가의 경제인맥이 짱짱한 편인데 이번 박근혜 비대위 참여도 김정렴 씨 등 박정희 정권 때의 오랜 인연도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14대 때 민자당 국회의원(전국구)으로 3선이 됐으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며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 여파 때문이었는지 그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함승희 전 의원이 그를 신문하다 안 되자 홍준표 검사가 10분 만에 자백을 받아냈다고 최근 홍준표 전 대표가 비화를 공개, 김종인 전 수석의 비대위원 자질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당시 주변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적극 반대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괘씸죄에 걸려 억울해 했다는 게 지인들의 말이다. [성]
재벌들 “입각 막자” 수군수군, 얼마나 겁났으면…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그는 복지와 분배를 중시하고 정부의 시장개입을 일정정도 허용하는 ‘계획경제학자’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의 경제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향후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핵심 포인트는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대북정책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이다. 남북문제는 결국 경제문제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북한을 지원해줘 경제통합을 서둘러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경제수석으로 재직할 때 재벌 개혁에 앞장서 많은 모함을 받기도 했다. 당시 증권가에는 ‘재벌그룹들이 그의 입각을 막기 위해 정치권 실세에게 총력 로비를 폈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 그의 후임 경제수석인 이진설 전 건설부 장관이 사촌매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를 했던 박봉환 전 동자부 장관이 자형으로 한 집안에서 세 명의 경제수석급 관료를 배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김재익 전 경제수석이 중매를 해서 35세로 늦게 결혼했다. 부인은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김미경 씨. 장인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 장인의 형이 재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다. 처가의 경제인맥이 짱짱한 편인데 이번 박근혜 비대위 참여도 김정렴 씨 등 박정희 정권 때의 오랜 인연도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14대 때 민자당 국회의원(전국구)으로 3선이 됐으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며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 여파 때문이었는지 그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함승희 전 의원이 그를 신문하다 안 되자 홍준표 검사가 10분 만에 자백을 받아냈다고 최근 홍준표 전 대표가 비화를 공개, 김종인 전 수석의 비대위원 자질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당시 주변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적극 반대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괘씸죄에 걸려 억울해 했다는 게 지인들의 말이다.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