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에 활동한 영국 화가 폴 내시는 전쟁을 주제로 독특한 풍경화를 창출해 미술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에 전쟁 기록 화가로 참전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독자적인 풍경 세계를 연출했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에서 모티브를 취해 초현실적 공허감이 깃든 독특한 감수성을 만들어냈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는 초토화된 벌판이다. 유혈이 낭자한 주검을 등장시키지 않고도 전쟁의 끔찍함을 더욱 부각했다.
내시의 대표작 ‘죽은 바다’는 낭만주의 풍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 분위기가 보인다. 굉음과 화염에 휩싸여 벌판으로 추락했을 비행기, 폭발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고, 흔적도 없이 타버렸을 군인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었을 검은 연기. 시간이 흐른 후 벌판엔 교교히 달빛이 내린다.
검붉은 언덕 아래 부서진 비행기 잔해들이 달빛에 반짝인다. 마치 파도가 소리 없이 넘실대는 밤바다처럼. 작가는 이런 광경에서 시적 환상을 보았다. 달빛에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 같은. 그런데 그 바다는 죽음의 바다다. 추락한 비행기 주검이 연출한 정지된 바다. 전쟁의 잔해가 보여주는 이 적막한 풍경은 전쟁의 공포를 한층 고조한다. 내시는 이런 풍경으로 전쟁의 참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이 단순히 전쟁 비판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독특한 환상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삭막하지만 현실의 풍경인데도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낯선 분위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점철됐던 현실이 작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낯선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현실을 비현실처럼 인정하는 자기 최면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그걸 보여주고 있다.
젊은 작가 형내인도 전쟁을 주제로 작업한다. 전쟁 경험이 없는 작가가 어떻게 전쟁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그가 작업의 모티브로 삼는 전쟁은 매스컴이나 책자 혹은 이전 세대의 경험담에 의한 정보 수준이다. 결국 전쟁은 작업의 동기일 뿐이다.
그의 작업은 단색조의 추상화면처럼 보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군인들의 모습이다. 전쟁 수행 중인 다양한 포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처럼 처절하다는 생각이다.
형내인은 인류 욕심이 만든 최악의 드라마를 통해 자기 반성적 회화를 보여주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인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전쟁 생리에 맞춰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