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9월 29일 손배 소송 제기 8년 만에 선고…1·2심은 모두 위안부 손 들어줘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9월 29일 오전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기지촌 위안부 소송에 대해 선고할 예정이다. 2014년 소송이 제기된 이후 무려 8년 만이다. 기지촌 위안부 출신 122명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6월 25일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하는 등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1월 20일 1심 재판부는 원고(기지촌 위안부)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2018년 2월 8일 2심에서도 “피고(대한민국)는 원고 74명에 700만 원씩, 43명에겐 300만 원씩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과 2심 모두 국가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며 위안부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은 2심이 끝난 지 4년 이상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이에 기지촌여성인권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이 지난 6월 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 최종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최초 소송을 제기했던 122명의 원고 중 일부가 사망해 111명으로 줄었다”며 조속한 대법원 판결을 촉구했다.
#판결문 통해 본 ‘미군 기지촌 위안부 65년사’
일요신문이 입수한 소장과 판결문에 따르면 원고들은 1957년경부터 우리나라에 있는 미군 주둔지 주변의 미군 상대 상업지구(속칭 기지촌)에서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 했던 여성들(속칭 위안부)이다. 기지촌은 서울 이태원을 비롯해 경기 파주 용주골, 의정부 뺏벌, 송탄 쑥고개, 인천 부평 백마장 등 미군 부대가 주둔한 전국 36곳에 있었다. 이 가운데 2심 판결이 나온 2018년 2월 시점엔 전국 19곳이 남아 있다.
소장과 판결문엔 기지촌 위안부 65년 역사도 담겨 있어 주목된다. 일제 패망 후 미군정은 1947년 ‘공창제도 폐지령’을 공포해 표면상으론 일제의 공창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정부는 연합군을 위해 직접 부대 내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 위안소는 휴전 후인 1954년 모두 폐쇄됐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군 수만 명이 우리 땅에 장기주둔하게 되면서 전국 각지에 기지촌이 형성됐다. 그러면서 기지촌 위안부의 ‘공식적인’ 역사도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인 1957년 7월경, 유엔(UN)군 사령부가 일본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할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 보건사회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 등은 ‘유엔군 출입 지정 접객업소 문제 및 특수 직업여성(위안부)들의 일정지역 집결 문제’를 논의해 위안부를 일정지역에 집결시키기로 합의했다.
당시 총무처가 작성한 ‘유엔군 사령부 이동에 수반하는 성병 관리 문제’라는 제목의 문서엔 “유엔군 사령부 이전에 수반해 외국군을 상대하는 매춘여성(위안부)들의 급증이 예상되는 바, 단속 내지 선도를 목적으로 (1957년) 7월 6일부터 보건사회부, 내무부, 법무부의 각…관들이 회합하여…일정지역 집결문제의 합의를 본 바 있으니 이에 따라 강구돼야 할 허다한 안건 중 당면한 성병 관리 문제의 긴박한…합리적인 관리방법을 심의코자 안건을 제출한다”고 기록돼 있다.
정부는 당시 유엔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서울에 접객업소 10개소, 인천 댄스홀 12개소, 부산 댄스홀 2개소 등을 미군 위안시설로 지정했다. 정부와 미군은 공동으로 ‘성병(性病)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의 성병을 관리했다. 당시 전염병예방법 시행령에 따르면 ‘위안부 또는 매음행위를 하는 자 1주 2회’에 걸쳐 특별시장이나 도지사가 지정한 성병 진료기관에서 건강진단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 정부는 이보다 앞선 1950년 유엔에서 체결된 ‘인신매매금지 및 타인의 매춘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바 있다. 또한 1957년 기지촌 위안부 역사가 시작된 이후인 1961년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해 성매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허울 좋은 종잇장에 불과했다. 유엔협약, 윤락행위 방지법 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부 조치들이 속속 나왔기 때문이다. 1962년 내무부, 법무부, 보건사회부 공동 지침으로 성매매 영업이 가능한 전국 104개 ‘특정지역’을 설치·관리했다. 유흥영업 종사자는 ‘유흥영업종사자등록증’과 ‘보건증(건강증, 속칭 패스)’을 발부받도록 했다. 위안부는 보건소에 등록하고 한 달에 2~8회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는 1969년부터 ‘기지촌 정화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서울 용산경찰서장 등이 1971년 6월 위안부에게 고지한 것으로 보이는 ‘미군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러분들에게’라는 제목의 공문에 따르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미군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일부…에게 불쾌감을 조장한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거의 일들은 반성하고 시정합시다. 그러한 사소한 사건도 여러분의 적들(북한)에게 유리하게 이용된다는 것을 아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적들을 돕고 있으며 국내안보는 약화된다는 것도 아셔야 되겠습니다.” 이처럼 미군에게 불쾌감을 주는 게 이적행위라는 식으로 엄포를 놓기도 했다.
정부는 1972년 2월 ‘기지촌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성병관리정책에 따르면 미군이 그 번호 등을 기억했다가 의료 당국에 알릴 수 있도록 기지촌 여성 가슴에 번호 또는 영어로 쓰인 명찰이나 보건증을 착용토록 했다.
1980년대 이후에도 보건사회부는 성병진료지침을 하달해 ‘위험집단(특수업태부)’을 중심으로 강제 검진과 치료를 시행토록 했다. 내무부는 1984년 기지촌 주변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해 ‘외국군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출국할 수 있도록’ 환경을 쾌적하게 한다는 취지가 포함된 기지촌 환경 개선 사업을 시행했다.
기지촌 위안부 소송 2심 재판부는 “설령 원고들(기지촌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시작했더라도 피고(대한민국)는 이를 기화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조장하거나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위법한 성병치료를 행함으로써 원고들의 성(性), 나아가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및 국가안보 강화, 그리고 기지촌 내 성매매 활성화를 통한 외화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부가 동일하지 않음도 명시했다. 법원은 “국가가 직접 성매매 의사가 없는 여성들을 강제로 성매매 장소로 끌고 가 성매매를 강요한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경우와 그 불법성 내지 위법성을 동일시할 수 없기는 하다”고 밝혔다.
역대 우리 정부는 기지촌 위안부 문제에 애써 눈을 감아왔다. 진보 성향을 띠었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도 불편한 진실의 뚜껑을 그냥 덮어뒀다. 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는 “우리 정부가 조직적으로 기지촌 위안부를 관리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정부는 보건증 등을 발급해주면서 확보한 전국 기지촌 위안부 명단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미군 기지촌 위안부 명단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안김정애 대표는 “정부가 위안부 명단을 갖고 있다고 확인해 줄 경우 불법 행위를 자인하는 꼴이어서 앞으로도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앞에선 "애국자" 뒤에선 '토벌'…미군 기지촌 위안부 인권유린 실상
주한미군 기지촌 위안부 가운데 성병 감염자로 판명되면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치료를 받았다. 비감염자는 ‘보건증’에 도장을 받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만약 보건증 없이 영업하거나 성병 검진을 기피한 여성은 단속했다. 정부는 위안부를 ‘지역재건부녀회’에 가입시켰다. 이후엔 자치회인 ‘자매회’에 등록시키기도 했다.
정부는 1962년 11월부터 지역재건부녀회에 등록한 위안부 1만 640명을 대상으로 정신, 미용, 위생, 간단한 영어회화 등을 교육시켰다. 이른바 ‘애국교육’이었다. 교육 담당 공무원들은 위안부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추켜세우는 한편 성병 검진을 반드시 받을 것을 강조했다. 심지어 위안부들에게 ‘앉는 태도’ 즉 “가랑이를 벌리지 마라. 다리를 꼬고 무릎을 세우고 이렇게 앉아라” 등 세부적인 자세까지 일일이 교육시켰다. 그러면서 “노후를 보장하고 전용아파트도 세워주겠다”고 했지만 감언이설이었다.
위안부 등록과 성병 검진을 기피하는 여성은 정부와 미군이 수시로 합동 단속했다. 정부 측에선 보건소 직원과 자매회가, 미군 측에선 미군 S-5(민사과)에서 주로 단속에 나섰다.
이른바 ‘토벌’과 ‘컨택(Contact Tracing·접촉자 추적조사)’도 기지촌 위안부를 긴장케 하는 단속이었다. 보건소와 경찰이 주도한 토벌 과정에서 보건증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보건증에 도장이 없어도 단속 대상에 포함됐다. 성병에 걸린 미군이 자신과 성매매 한 여성을 지목하는 컨택도 수시로 실시됐다. 성병 걸린 미군이 자신과 성매매 한 여성이 아닌 여성을 지목해도 지목당한 여성은 단속 대상이었다.
토벌이나 컨택 단속에 걸리면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로 격리 수용된 상태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성병 치료를 한다며 페니실린 주사를 무차별 투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페니실린 쇼크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사망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낙검자 수용소에선 위안부 인격권과 신체 자유 등 기본권 침해 사례가 횡행했다고 위안부들은 전했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