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을 해도 ‘한번 왕따는 영원한 왕따’
▲ 이지메를 다룬 일본 영화 <문제없는 우리들>. |
해를 거듭할수록 일본 학생들의 이지메 수법은 더 교묘하고 잔인해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금품 갈취, 심부름, 구타와 성적 괴롭힘 등에 이어 신종 ‘인터넷 이지메’도 등장했다. 가해학생들은 사이트나 블로그를 만들고 피해학생의 이름과 사진,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 등 개인정보와 학대 사진이나 동영상을 버젓이 올린다. 또 메일이나 SNS로 죽으라는 둥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 문부성의 조사에 따르면 2008년 이런 사이트가 4만 여개나 확인됐다. 일본 국립교육정책연구소가 낸 이지메 사례집과 관련보도를 바탕으로 최근 일본의 이지메 실태를 살펴봤다.
인터넷 이지메 발생 건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본 문부성 통계에 의하면, 2009년 이후 연 평균 6000여 건에 이른다. 인터넷 이지메는 가해학생들이 누구나 쉽게 익명으로 접속할 수 있는 카페나 블로그 등을 만들고 프로필에 이지메 대상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면서 시작된다. 그 후 게시판에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피해학생에 대한 악의적인 글을 지속적으로 올린다.
이런 사이트는 원래 ‘우라(뒤라는 뜻) 사이트’란 은어로 불리며 학생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알려졌다. 그러던 2007년 고베시의 한 고교에서 수업 도중 화장실에 가겠다며 교실을 나가 학교 건물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학생의 사건을 계기로 널리 알려졌다.
이 학생은 죽기 1년 전부터 동급생 서너 명한테 50만 엔(약 753만 원) 남짓의 거액을 빼앗겨 왔다. 자살 후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학교 측은 “이지메를 당한 게 아니라 비행을 저지른 학생들과 갈등을 겪었을 뿐”이라며 변명을 했다. 하지만 한 TV프로그램이 취재를 하다가 우연히 ‘우라 사이트’에서 자살한 고교생의 알몸 사진과 주소, 이름 등을 찾아냈다. 사진 밑에는 피해 학생의 등하굣길 동선도 쓰여 있었다. 먹잇감이 되기 쉽게 가공된 정보가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IT잡지 <주간아스키>의 분석에 따르면 신분이 노출된 피해학생들은 기존의 가해자뿐 아니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괴롭히는 전화를 받고 통학 길에서 갑자기 공격을 당한다. 인터넷 이지메 피해자로서는 누가 가해자인지 가늠할 수 없어 한층 공포를 느낀다. 3~4년 전에 쓴 글이 게시판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흔해 피해는 심각하다. 또한 아무 게시판이나 닥치는 대로 들어가 피해학생 이름과 험담을 써놓기도 한다.
가해학생이 피해학생인 것처럼 가장하는 인터넷 이지메도 있다. 일명 ‘나리스마시(행세) 이지메’다. 2011년 한 중학교에서는 가해자인 한 여중생이 피해 여학생인 것처럼 글을 올렸다. ‘나는 성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어른들과 부적절한 성적 만남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고백했다. 우연히 글을 본 피해학생의 학부모가 학교에 알리면서 이지메가 드러났다.
이처럼 이지메 대상이 여학생인 경우는 성인 데이트나 원조교제 사이트 등에 신상정보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흔하다. 피해 여학생 얼굴 사진을 나체 사진과 합성해 올려놓거나 피해학생이 체육시간 전에 탈의실에서 운동복을 갈아입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우라 사이트’에 올려 공유한다. 대상이 남학생인 경우는 피해학생의 바지를 벗겨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
가해학생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이지메에 가담시키고자 메일을 보낸다. 일명 ‘체인 메일’이다. ‘누구를 언제 어떻게 괴롭히라’란 식으로 메일을 보내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다음 차례는 너’라고 겁을 준다. 메일을 받으면 마치 행운의 편지처럼 다수에게 전파하라고 한다. 죄책감을 덜고자 가해자를 굴비 엮듯 줄줄이 엮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교육전문가 오카무라 미호코는 “이전에는 주로 체격이 작거나 동작이 굼뜨고 어눌하며 옷을 잘 갈아입지 않고 씻지 않는 아이, 성격이 온화하고 내향적인 아이를 겨냥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질적이란 느낌을 주면 즉시 이지메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는 피해학생을 세균이라 부르며 조롱하거나 기절할 때까지 목을 조르고 몸을 누르며 팔다리를 비트는 등 무시하거나 물리적 공격을 중심으로 했다면, 요즘은 이런 괴롭힘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인터넷 이지메로 연결해 흡사 게임하듯 이지메를 즐긴다.
2011년 군마현 한 중학교의 소위 ‘햄버거 이지메’ 동영상은 온라인 게임 채팅창에서 인기리에 퍼져 나갔다. 수학여행 숙소에서 찍은 이 동영상에는 무려 7~8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한 명의 학생을 이불로 덮은 뒤 그 위에 차례대로 엎드려 올라탄다. 숨을 잘 쉬지 못하도록 괴롭히는 것이다. 유포된 동영상에는 ‘죽어라, 죽어! 재밌지?’란 자막이 나온다. 또 다수가 모인 채팅창에서 동영상을 주고받으며 ‘(영상에 나오는 피해학생은) 대체 언제 죽는 거냐?’란 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런 채팅 대화를 모두 캡처해 ‘우라 사이트’에 올린다. 피해 학생이 이를 봤을 때 받을 심적 고통이 어떨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상대에게 창피함과 멸시 등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하는 셈이다. 실제 피해학생이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 밖에 서서 냄새가 난다고 웅성대며 용변을 못 보게 집단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빈번하자 이를 막기 위해 1인 전용 화장실을 설치한 학교도 등장했다.
또 하나 일본 이지메의 큰 특징은 이지메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이지메 카스트’란 말이 있다. 인기를 기준으로 초등학교 때 아이들 사이에 서열이 정해지면서 이지메를 당한 아이가 중학교로 진학해도 또 이지메를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의 신분제 카스트처럼 영구불변하단 의미다. 전문가들은 “초등학생이 학교 가기를 꺼려하면 이미 중대한 사태라고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007년 일본 문부성은 피해학생이 언제든 상담전화를 할 수 있도록 24시간 핫라인을 만든 바 있다. 2010년에는 교내 휴대폰 소지 금지 지침도 내놨고, 민간업체에 의뢰해 인터넷 이지메 사이트를 적발해 폐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로 ‘마음의 전염병’이라고까지 불리는 이지메를 과연 근절할 수 있을지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크다. 가해학생들은 14세 미만일 경우 일본의 현행 소년법에 따라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학생의 부모들은 시민단체를 조직해 자살한 자식의 유서를 공개하거나 여타 피해학생이나 학부모를 지원한다. 또 이지메 숨기기에 급급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학교나 지자체 교육위, 가해학생 부모를 대상으로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지메 피해 증거를 전문적으로 모아주는 탐정 사무소도 성업 중이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