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이 동국이…, 날개 다시 달아 주고파
▲ 박주영을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는 최 감독. 그의 말 속엔 선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오른쪽은 박주영, 이동국 캐리커처. 사진=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지난 1월 12일 오후 1시. 여전히 최강희 감독은 인터뷰 중이었다. 축구협회 직원이 죽을 사다 놓고 최 감독의 인터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는 죽도 먹지 못한 채 다음 인터뷰를 시작했다. 속이 안 좋아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나왔다는 그는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다’는 거짓말을 하며 줄줄이 늘어선 인터뷰를 소화하고 있었다.
촬영을 위해 최 감독과 함께 축협 옆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으로 향했다. 핑크색 넥타이도 풀게 하고, 목까지 채워져 있는 와이셔츠 단추도 하나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추를 풀고 사진을 찍는다며 최 감독이 환하게 웃는다. “오늘까지 인터뷰하고 나면 잠시 잠수를 타야겠다”며 동행한 축구협회 관계자에게 자신을 찾지 말아달라는 ‘특별’ 부탁도 건넨다.
▲ 그는 언론사들의 릴레이 마라톤 인터뷰에도 지친 기색 없이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냈다.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나도 그렇다. 이렇게 정색하고 인터뷰를 하려니까 어색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젠 번복할 수 없는 일이고,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이 많이 어색하면 소주라도 한 병 갖다 놓고 시작할 걸 그랬나보다(웃음).
―인터뷰 질문을 준비하면서 정말 괴로웠다. 많은 매체들과 인터뷰를 했고, 이미 나올 얘기는 다 나온 셈이라 더더욱 힘들다.
▲가발 얘기만 안 하면 된다. 결혼 이후 쭉 이 헤어스타일을 고수해왔더니 내 머리카락의 진위 여부에 많이들 집착하신다. 가발 여부를 묻는 기자들한테는 직접 머리카락을 만져보라고 말했다.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이후 ‘최강희’란 사람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느낌이 든다. 대표팀 소집은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던 감독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너무 일찍 발표해서 그래(웃음). 대표팀 소집 직전에 발표했으면 이렇게 언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 어쩌겠나. 대표팀 감독이 해야 할 일 중 한 가지니까 즐기면서 하려고 한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가족들도 힘들어 하고. 기자들이 집에까지 찾아와서 옛날에 그린 만화까지 갖고 가는 상황들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17세 이하 여자대표팀을 이끌었던 최덕주 감독을 수석코치로 불러들인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패밀리’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수석코치의 역할은 두 가지다. 전술적인 마인드가 뛰어나서 감독한테 훈련이나 경기할 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든가 아니면 대표팀 분위기가 흐트러져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처럼 선수들을 따뜻하게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가운데 최덕주 코치가 생각났다. 여자축구계에선 뛰어난 사람인데, 다행히 올해 큰 대회가 없다는 얘길 들었다. 최 코치 선임 이후에 ‘최 감독이 자신을 젊게 보이려고 최 코치를 선임했다’는 루머가 나돌더라(웃음).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정말 그렇다면 나한테는 기분 좋은 일이다. 하하.
―수원 삼성에서 7년간 코치를 하다 2002년 1월 13일에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 당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잠시 자살충동까지 느꼈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2002년 1월 13일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부분 코치를 자르려면 12월 이전에 통보를 한다. 그래야 다른 팀이라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들이 모두 전지훈련을 떠난 1월에 해임 통보를 받았다. 해임 사유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라 그 후유증이 꽤 깊고 길었다. 무작정 가족들 데리고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축구의 나라’에 가서 두 달 가까이 축구를 보지 않고 지냈다. 한국을 떠날 때는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축구 유학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나갔지만 내 가슴에선 축구란 단어를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들이 머물던 도시가 스페인의 라코쿠냐였다. 전남 광양처럼 조그만 항구도시였는데 비가 많이 오고 한적한 곳이라 날씨도 내 마음도 우중충한 상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챔피언스리그 8강, 4강전이 라코쿠냐에서 열렸다. 데포르티보가 레버쿠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맞아 경기를 치르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그때 스페인 가서 처음으로 축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맨유의 긱스와 베컴이 골을 넣어서 데포르티보가 맨유한테 0-2로 졌다. 당시의 일은 나한테는 꽤 아픈 기억이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
―수원에서 코치할 때 최 감독의 별명이 ‘칼있으마’ ‘저승사자’로 불렸었다. 선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들었다. 당시 악동으로 소문났던 고종수 데니스 산드로에게 벌금 500만 원을 물리지 않았나.
▲그 당시 인연 또는 악연을 맺었던 선수들 중엔 전북현대를 왔다 간 선수도 있고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했던 선수도 있다. 그걸 보면서 내가 수원 시절, 선수들한테 나쁘게만 굴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고종수도 전북에 오고 싶어 했으니까. 당시에는 그런 역할을 해주는 코치가 필요했다. 김호 감독님이 나서서 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악역을 맡게 됐는데, 감독이 되고 나니까 굳이 그렇게 악랄하게 굴지 않아도 선수들이 말을 잘 듣더라(웃음).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이후 쿠엘류 감독이 대표팀을 맡게 됐었다. 당시 수석코치로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쿠엘류 감독과 불편한 관계를 노출시켜 ‘감독 흔들기’의 주동자로 내몰린 적이 있었다.
▲너무 나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해 오신 것 같아 겁이 난다(웃음). 내가 외국 감독을 여러 명 모신 것은 아니지만 히딩크 감독을 보좌한 코치들, 본프레레 감독을 모신 코치들로부터 외국 감독에 대해 많은 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쿠엘류 감독은 유럽에서 축구해설로는 명성이 있는 분이지만 오랫동안 감독직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카리스마나 결단력 면에서 우리의 정서랑 맞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코치 입장에선 뭔가를 얘기해야만 했다. 외국 감독이라고 해서 무조건 머리 숙이고 있으면 한국 축구를 너무 쉽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통역을 통해 내 의견을 전달했는데, 아무래도 한 사람을 거쳐 들어가는 얘기다보니 100 중에서 60, 70만 그분의 귀에 들어간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외국 감독이라고 해도 정말 엄선해야 모셔 와야 한다. 아무나 오면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다.
▲히딩크 감독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다. 만약 히딩크 감독한테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보따리 싸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히딩크 감독의 능력은 다 알려진 부분이지만, 그분한테는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시간이 주어졌고, 많이 기다려줬고, 많이 참아줬다. 즉 2002년 월드컵과 그 이후의 상황은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외국 감독은 한계가 분명하다. 임기 말이 되면 한국 축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다. 남아서 지켜야 하는 몫은 우리들이다.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절함, 무한 애정, 이런 열정은 한국 지도자 외엔 기대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최 감독이 자신의 임기를 2013년 6월 이전, 즉 월드컵 본선 진출 전까지만 맡는 걸로 한계를 정하고, 그 후에는 능력 있는 외국 감독이 한국 축구를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축구계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다. 단기전에서 최고의 효과를 내기 위해선 그 방법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실력을 가진 K리그 지도자나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 등도 있기 때문에 굳이 내가 본선까지 이끌고 갈 필요가 없다. 난 축구 지도자를 하면서도 대표팀 감독이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덜컥 맡게 되면서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는다. 결정은 내가 했고, 주어진 시간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것이다.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면 ‘봉동 이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봉동 이장’직도 평생 직장은 아니지 않나. 결국 그 자리도 성적을 내지 못하면 물러나야 하는 자리 아닌가.
▲정확한 지적이다. 어쩌면 쿠웨이트전에서 실패하면 전북 현대로 돌아갈 수조차 없을 것이다. 대표팀에서 실패한 감독이 클럽팀으로 돌아갈 수 있겠나. 좋은 성적을 내고 돌아가면 이장에서 읍장으로 승진될 것이고, 반대의 상황이라면 역적이 돼서 이장직도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이장은 가능하다. 내가 봉동의 명예이장이기 때문이다.
―아직 봉동에서 명예이장 임명장을 받지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우리’를 뛰쳐나오는 바람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두 차례나 놓쳤다. 그래도 돌아가면 주지 않을까 싶다.
―대표팀을 맡고 보니, 이전 성인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 사이에서 선수 차출 문제가 불거진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보나.
▲그것은 당사자들(조광래 감독과 홍명보 감독)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난 전북에 있을 때도 그런 논란이 외부에 비춰져서 갈등 양상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대표팀을 맡자마자 바로 정리했다. 유럽과 달리 한국은 올림픽대표팀도 중요하다. 병역 문제도 걸려있고 올림픽 금메달의 가치가 유럽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드컵 못지않게 올림픽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해결이 쉬워진다.
―이전에 인터뷰했을 때 ‘이동국은 전북현대에서 충분히 행복하다’며 대표팀에 발탁되는 걸 불편하게 바라봤다.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된 것 같은데, 어떤 설명이 가능하겠나.
▲참 예리하게 질문하신다. 지금은 내가 대표팀 감독이니까 동국이가 대표팀에 들어와서도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동국이 외에도 축구선수들이 의외로 소심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억눌린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기 때문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데 대해 힘들어 한다. 난 선수들에게 ‘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선수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장’을. 그걸 하고 안 하고의 몫은 선수들이다.
―2월 29일 쿠웨이트전에서 뛰는 선발명단에 대해 관심이 집중돼 있다. 이번에 발탁하는 선수들 중 의외의 ‘깜짝 카드’가 있나?
▲이번 경기에는 아쉽게도 ‘깜짝 카드’를 쓸 수가 없다.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달려 있는 중요한 경기이기 때문에 실험용이나 대체 카드가 아닌 실전에 바로 투입시킬 수 있는 베테랑 선수들 위주로 구성할 예정이다. 어린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90분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만 한다. 그러나 베테랑 선수들은 관중석에 가족들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보일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선수들을 뽑아야 할 것이다.
―박주영에 대한 질문은 너무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겠다. 지금 바로 눈 앞에 박주영이 있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
▲정말 그렇다면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꼭 껴안아주고 싶다. 내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면 박주영도 ‘이 아저씨가 날 필요로 하는구나’ 하고 느끼지 않을까. 누구보다 선수 자신이 제일 힘들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도 진짜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힘들지만 박주영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주영 얘기를 하는 최강희 감독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의 말 속에는 선수에 대한 진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비록 박주영과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이 ‘아저씨’는 한국에서 축구를 하는 선수들은 모두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히 박주영처럼 한국 축구 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야 할 선수라면 그는 더 넓은 가슴으로 안아줄 것이다.
쿠웨이트전에 합류할 대표팀 명단 중, 두 명은 확실하다. 한 명은 이동국이고, 다른 한 명은 박주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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