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향해 진실의 돌팔매질
(다음 호에는 윤양중·제재형 편이 이어집니다)
▲ <중앙일보>는 1968년 1·21 사태 당시 단독으로 김신조 인터뷰를 따내 특종보도했다. 작은 사진은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 재판 모습. |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0년 4월 한국일보 수습 11기로 공교롭게도 4·19 혁명이 일어난 달이었다. 당시 신문은 4·19 혁명 이후 거센 민주화 바람을 타고 하루하루 속보를 쏟아내기 바빴다. 매일 뉴스가 넘쳤고 그만큼 특종을 거머쥘 기회도 많았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 이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정권은 조그만 기사 하나에도 감시의 칼날을 세워 기사를 가위질하기 일쑤였고 정권을 비난하는 문장이 들어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수사당국에 연행돼 협박을 받고 밤샘조사를 당했다.
이처럼 엄혹한 현실도 특종을 향한 기자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법. 김 기자의 첫 특종은 196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증권파동사건’ 관련 보도였다. 증권파동사건은 증권사 사장과 중앙정보부 고위 임원이 부당한 압력으로 주식을 싸게 사들인 뒤 거액의 차액을 챙긴 사건이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증권거래소를 실제적으로 장악한 다음 무모하게 주식을 사고팔아 결국 국내 증권시장 파동을 몰고 왔다. 당시 사건은 비밀영장발부제도가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기에 비공개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 김 기자는 수소문 끝에 비밀영장 담당판사가 유태흥 부장판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60년대는 신문이 조·석간으로 발행되던 시절이라 기자들은 밤에도 자유롭게 청사를 드나들 수 있었다. 법원 정식 출입 기자였던 김 기자는 어느 날 기자실에 들어가는 척하면서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부장판사실에 침입해 서랍과 서류를 뒤졌다. 그는 당시 취재에 관해 “손전등 불빛에 의지한 채 영장부분을 베껴내던 순간은 내 생애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몇 차례 특수건조물침입죄(?)를 저지른 끝에 김 기자는 증권파동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법조계 취재 시절 가장 쓰라린 기억으로 남은 사건은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취재했을 때다. 최초 이 사건은 검찰이 ‘기소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상부에 기소 거부의견서를 제출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소를 거부했던 검사들은 사표를 낸 후 퇴출됐고 피고인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김 기자는 재판 과정에서 인혁당 관련자 전원이 전기고문, 물고문, 매질 등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사자들로부터 고문당했던 증언을 들어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됐고 1975년 8월 15일 사형이 선고됐다. 8명은 판결이 난 지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책에서 “이른 아침 사형 집행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석간을 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썼다. 이 사건을 겪은 이후 김 기자는 더욱 더 끈질기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건 현장을 파헤치게 됐다.
세월이 흘러 중앙일보 사회부 데스크를 맡게 된 그는 지면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가장 내세울 만한 지면이라면 단연 1968년 1월 22일자 석간신문이다. 전날인 1월 21일 북한 무장 공비 31명은 “박정희의 목을 따라”는 지령을 받고 청와대 뒤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다. 이른바 ‘1·21 사태’다. 이날 남침한 북한 공비 가운데 28명은 사살됐고 2명은 북으로 달아났으며 1명은 생포됐다. 이날 중앙일보는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와 단독 인터뷰에 성공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침입 경위를 담은 문답을 1면 톱기사로 특종 보도했다. 서대문 불광동 쪽에 괴한 1명이 붙잡혔다는 제보를 받고 담당 기자를 현장에 급파한 결과 뜻밖의 특종을 낚았던 것이다.
김신조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 기자는 의기양양하게 국장석을 향해 “우리 특종 톱기사입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국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화를 입을까 우려해 1면 하단에 축소 보도하자고 한 것이다. 김 씨는 “제가 모가지를 걸고 책임지겠다”고 톱기사로 배치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바람대로 톱기사로 배치됐다. 마감시간까지 늦춰가며 완성된 “서울시내 무장간첩 31명이 경복궁까지 침투” 기사는 대서 특필돼 당일 중앙일보는 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김 씨는 “30년 언론 인생 중 가장 자랑스런 추억이었다”고 밝혔다.
30년간 치열한 역사의 관찰자였던 김석성 기자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에 낙향해 부안여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7·4남북공동성명 이듬해인 1973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정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다시 만났다. 오른쪽은 1994년 <일요신문> 카메라에 잡힌 모습. |
심상기 기자(77)는 중앙일보 정치부 시절 세계적인 특종을 놓쳤다. 정치부 차장이던 1972년 5월. 취재차 옛 태평로 의사당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중앙정보부 언론과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날아든다. 서로 일면식은 있으나 거의 만날 일이 없는 사이였다. 이 자리에서 언론과장은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과 함께 심 차장을 대기시켜 놓은 지프로 안내했다.
심 차장을 태운 차가 도착한 곳은 광화문 맞은편에 위치한 종합청사.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중앙정보부 김동근 차장보였다. 심 차장과 마주앉은 김 차장보는 다짜고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에 관한 소스(취재원)를 밝히라”고 다그쳤다.
1972년 이후락 정보부장은 5월 2일부터 5일까지 3박 4일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후락의 방북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 고위층만 알고 있는 극비 사안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후락의 방북 사실은 이날 함께 공개됐다)을 앞두고 중앙정보부 입장에서는 심 차장의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후락이 방북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정보를 입수하게 된 심 차장은 정치부 데스크를 향해 “기사를 쓰면 세계적인 특종이 됩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편집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거니와 사실 그대로 쓰기에 너무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유신체제 속에서 모든 기자들은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살았다. 세종대학교 남시욱 교수 역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박정희, 이후락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기사에는 ‘청와대 소식통’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김동근 차장보는 “심 차장에게는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터이니 누구로부터 방북 사실을 취재했는지 얘기해 달라”며 여러 차례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얘기를 들은 일도 누구에게 전한 일도 없다”고 딱 잡아뗐다. 취재원과의 신의를 지키고 싶어서였다. 더욱이 유신체제 하에 정부 고위직 인사가 일급비밀을 기자에게 누설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떤 처벌이 가해질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 차장의 의지가 확고해 보이자 김동근 차장보는 “더 조사를 받아야겠다”며 그를 남산 밑에 있던 한 호텔로 끌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정보부 수사관들의 폭언과 주먹,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만일 지금 기자들이 정부 관계자들에게 폭행을 당한다면 국민적 공분을 살 일이겠지만 과거에는 기자 역시 폭력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설상가상 옆방에서는 심 차장으로부터 ‘이후락 방북설’을 전해 듣고 상부에 보고한 서울시경의 한 경사도 심문을 받고 있었다.
조사관들의 구타와 경사와의 대질심문에도 요지부동하자 수사관들은 심 차장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도 조사결과를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 심 차장이 국회 주변 어느 누군가에게 듣긴 했으나 시간이 지나 이름은 잊어버렸다”고 말하겠다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심 자창은 장시간 고초를 겪었으나 취재원을 밝히지 않은 채 귀가 할 수 있었다.
이날 심문으로 심 차장은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고막이 찢어지는 등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더 뼈아픈 것은 세계적인 특종을 놓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정보를 귀띔해 주었던 고위 공직자는 그가 남산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사히 공직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신체제가 끝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심 차장 역시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언론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통폐합이나 보도지침과 같이 전보다 나빠졌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심 국장은 취임 이후 ‘제3공화국’의 어두웠던 뒷면을 파헤치는 연재를 시작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경쟁지에서도 잇따라 3공화국 비사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신문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자연히 탐사보도체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국가 기관에서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정부당국은 국가 업무를 보는 데 지장이 있으니 연재를 중단하라고 심 국장을 압박했다. 결국 연재물은 34회 만에 <제1부 끝>이라는 부제를 단 채 어정쩡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편집국장 사퇴 압력에도 시달렸다. 하루는 홍진기 당시 중앙일보 회장이 그를 불러 “2, 3년 미국이나 일본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느냐”며 외국유학을 권유했고 먹히지 않자 삼성 임원직으로의 이적도 제의했다. 월급쟁이인 기자에게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지만 그는 20년 이상 몸담은 언론 쪽을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결국 심 국장은 “출판 담당은 하겠느냐”는 의견을 수용해 중앙일보 출판담당 이사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심 국장은 이후 서울문화사를 세워 지금까지 언론·출판계를 이끌고 있다. 그는 책에서 “언론계 숙청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끊임없이 계속됐고,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은 모두 언론계 출신 인사들이었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