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대모’에서 독한 ‘여전사’ 변신
▲ 지난 11일 열린 민주통합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합동연설회에서 한명숙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15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한 후보가 기자회견을 하며 울먹이는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정권 교체’라는 지상과제를 진두지휘하게 될 한 대표는 일단 4월 치러지는 총선에 ‘올인’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한 대표가 공천개혁과 야권통합을 순조롭게 이뤄낼지가 ‘한명숙 체제’의 순항 여부를 좌우할 첫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벌써부터 민주통합당 안팎에선 한 대표를 필두로 한 친노 인사들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1·15 전당대회 후보자 연설에서 “정치인생 마지막 싸움을 하려 한다”며 표를 호소했던 한 대표. ‘부드러운 카리스마’에서 독기 품은 ‘여전사’로 변신한 한명숙의 정치 이면을 들여다봤다.
1위가 확정된 후 수락 연설을 위해 단상에 선 한명숙 대표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지지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전당대회 현장에서 만난 한 대의원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느냐. 검찰의 표적수사, 서울시장 선거 패배 등 정치인으로선 ‘재기 불능’ 상태까지 갔던 한 대표였다. 그 무엇보다도 서거하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라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 역시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전당대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한 대표에게 ‘소감 한 말씀’을 청하자 “정신없다. 책임감을 느낀다”고 짧게 답했다. 한 대표는 조촐하게 ‘뒤풀이’를 마친 뒤 지인들과 다음 날 일정 및 당직 인선 등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 한명숙 후보가 15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당선된 후 기뻐하는 모습. |
한 대표가 첫 최고위원 회의(1월 16일)와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과의 회동(1월 17일)에서 ‘국민 참여경선’, ‘모바일 투표’ 등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도 1·15 전당대회 결과에서 얻은 ‘자신감’과 ‘정당성’에서 비롯됐다는 관측이다.
한 대표가 공식 일정 첫날 찾은 곳은 바로 마장동 축산시장이었다. 한 대표는 “축산시장·유통과정·소비자 모두 어렵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이야기를 듣고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러 왔다”고 밝혔다. 6시 30분쯤 신임 최고위원들과 함께 민주통합당을 상징하는 연두색 점퍼를 입고 나타난 한 대표는 시장 곳곳을 돌면서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상인들 손을 잡으며 “힘내세요”라며 일일이 말을 건네던 한 대표에게 최근 소값 폭락에 대해 물었더니 “안타깝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책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한 대표는 상인들에게 “FTA 체결로 수입 쇠고기가 들어오니 한우가 설 자리가 없다. 정부가 적극 나서서 수급 조절을 하고 쇠고기 수입제한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갖고 방문해 줘 고맙다. 또 한 대표가 여자라서 그런지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면서도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한 대표가 축산시장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민생을 최우선 가치로 할 것”이라는 ‘대국민 약속’의 실천이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한 대표가 1월 17일 라디오 연설을 통해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듯이 민생을 보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 등을 통해 비춰졌던 한 대표 이미지가 ‘온화하고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행보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바다.
▲ 한 대표가 17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예방해 환담을 나누는 모습. |
그러나 지금 민주통합당 내부에선 ‘한명숙이 변했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첫 최고회의 자리 석상에서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한 대표를 향해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는 반응을 내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대표는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내며 대여투쟁과 검찰·재벌 개혁 등을 외쳤다. 민주통합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의외였다. 첫 최고위원 회의였던 만큼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히는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권 심판을 앞에 내세웠다. 앞으로 한 대표가 ‘강경 모드’로 당 전면에 나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한 대표 주변에선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한 대표 측근은 “겉모습만 봤을 때 한 대표가 화도 제대로 못 낼 것 같지만 한번 결심하면 그 누구보다 단호한 측면이 있다.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오면서 쌓아 온 ‘내공’이 상당하다. 평상시엔 부드럽다가도 때론 냉정하리만큼 차갑게 변한다. 제대로 싸우면 그 누구도 한 대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 대표 총리 시절 지근거리에서 일했다는 한 공직자도 “정치인이 총리 혹은 장관으로 오면 공무원들은 흔히 말하는 ‘간보기’를 한다. 그런데 당시 총리실에서 한 대표에게 (간보기를) 시도했다가 혼쭐이 났던 직원이 있었다. ‘강성’으로 소문났던 이해찬 전 총리 다음에 한 대표가 와서 조금 안심했었는데 오히려 더 바싹 ‘군기’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야권에선 한 대표의 이러한 ‘강경 본색’을 끄집어낸 견인차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이라는 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검찰 수사 등을 겪으며 한 대표의 ‘야성’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뇌물수수 혐의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두 차례나 기소됐지만 모두 무죄판결을 받으며 제1야당 수장자리까지 올랐다. 한 대표는 사석에서 여러 차례 “현실 정치를 너무 만만히 봤다. 정권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지 몸으로 체감했다. 반드시 정권을 되찾아 올 것”이라며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시련이 결국 한 대표를 ‘철의 여인’으로 탈바꿈시킨 셈이다. 참여정부 인사들은 “한 대표가 다른 것은 몰라도 검찰개혁만은 꼭 이뤄내 주길 바란다. 한 대표 본인은 물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을 풀어주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독기 품은’ 한 대표에게 다가온 첫 번째 시험대는 총선 필승카드인 야권 통합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과감한 인적 쇄신이 불가피하다. 한 대표는 취임 직후 “전략공천을 최소화하고, 완전 국민경선으로 공천권을 돌려드리겠다”는 일성을 던진 바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을 듯하다. 벌써부터 민주통합당 내부에선 친노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대표 측은 “친노-비노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도 “한 대표가 당무를 잘 추진할 수 있도록 강력한 친정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 대표가 당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종석 전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총선 공천권 등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무총장직은 통상 3선급 이상 의원이 맡는 게 관례였지만 한 대표는 자신과 가까운 임 전 의원을 발탁하면서 당 장악 의지를 내비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한 대표의 ‘힘겨운’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 한명숙 전 총리가 13일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쪽선 메스 들고 저쪽선 칼 들고
한명숙 대표는 당 사무총장에 임종석 전 의원을 기용했다. 지난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때 임 전 의원을 대변인으로 기용하며 호흡을 맞춘 것도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임 전 의원의 기용을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한 대표의 검찰 개혁 의지가 담겨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임 전 의원은 지난해 12월 28일 삼화저축은행에서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2심 재판을 앞둔 상태다.
#저격수 박영선 선봉 나설 듯
한 대표는 지난 1월 13일 뇌물수수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표적수사로 인한 제2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임종석의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은 “한 대표는 임 의원이 무죄라고 확신하고 있다”면서 “그렇지 않았다면 당 핵심인 사무총장에 임명했겠느냐”고 반문했다.
한 대표는 공직비리 수사처 설치, 대검중수부 폐지 등 검찰로서는 ‘민감한’ 사안들을 적극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한 대표 측근은 “정치검찰의 폐해를 몸소 겪은 한 대표가 가장 칼을 갈고 있는 곳이 바로 중수부다. 폐지를 밀어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한 대표를 포함한 민주통합당 신임 지도부는 4월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검찰을 뿌리부터 바꾼다는 것에 합의를 모은 상태다.
여기엔 전당대회 3위로 최고위원에 오른 박영선 의원이 선봉에 설 가능성이 크다. 민주통합당 내 ‘검찰 저격수’로 명성이 높은 박 의원은 첫 최고위원 회의에서 “검찰 개혁의 기본 원칙은 정치검찰을 퇴출시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검찰 “한 대표 수사 아직 끝난 게 아냐”
이에 대해 검찰은 “정치권 일에 할 말이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내심 불쾌해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대검 중수부의 한 고위 인사는 “비리 혐의로 재판 중인 인사를 당 사무총장에 임명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일인지 묻고 싶다. 무슨 민주통합당이 치외법권이라도 된다는 말이냐”고 말하면서 “검찰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한 대표에 대해서도 “수사는 끝난 게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혹들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대한통운 곽영욱 전 사장으로부터 미화 5만 달러, 한만호 한신건영 전 대표로부터 9억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지만 지금까지 재판에선 모두 무죄를 받았다. 검찰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대표는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이 예방한 자리에서 “제가 검찰개혁을 주장하니까 검찰에서 지금도 공격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