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법원 ‘관할권 없음’으로 핀펫 특허 관련 소송 기각 …분쟁 처리 위한 약정 무시했다는 지적도
‘벌크 핀펫’은 현 이종호 과학기술부 장관이 교수 시절인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낸 3차원 트랜지스터 기술이다. 반도체 소형화의 핵심 기술로 인텔이나 애플 등이 수백억 원씩 특허 사용료를 내면서 사용하는 업계 표준 기술이다. 2020년 삼성전자가 KIP와의 특허소송에서 패소 뒤 합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번 미국 소송은 특허소송에서 승소한 후로도 카이스트가 특허 수익을 1년 넘게 배분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카이스트가 특허 수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은 특허 수익이 확정되지 않은 탓이다. 특허 수익이 확정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소송비용 전문대출회사인 폴리나펀딩코(폴리나)와 KIP가 특허 수익을 놓고 중재소송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선 핀펫기술의 특허권자가 둘로 나뉘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2001년 이종호 교수는 당시 재직하던 원광대와 카이스트의 합작 연구를 통해 벌크 핀펫 기술을 완성하고 카이스트에 특허 출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산상의 이유로 카이스트가 국내 특허만 출원하기로 결정하면서 미국 특허는 이 교수가 개인적으로 출원하게 된다.
즉 한국과 미국의 특허권자가 각각 다른 셈이다. 그렇기에 인텔, 애플, TSMC 등 글로벌 대기업들에게 로열티를 징수할 때도 한국 특허분과 미국 특허분으로 나누어 지급되도록 계약을 해 왔다. 미국 시장의 규모가 훨씬 큰 탓에 카이스트가 가져갈 수 있는 비율은 크지 않다. 다만 삼성 관련 기업의 경우 합의 후 특허사용계약을 체결하면서 6 대 4 수준으로 카이스트가 가져갈 수 있는 수익의 비율이 크게 책정됐다. 통상적인 수준에 비해 카이스트에 상당히 유리한 비율이라고 볼 수 있다. 폴리나가 제동을 건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미국에서 삼성과의 소송에 650만 달러의 소송자금을 투자한 폴리나는 한국 특허분 비율이 지나치게 카이스트에 높게 책정됐다면서 2020년 8월 미국 중재재판소에 긴급구제명령을 신청했다. 미국 특허에 할당되는 로열티 규모가 줄어 손해를 보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 중재재판소는 삼성으로부터 수수한 한국 특허 로열티의 일부인 2100만 달러를 우선 별도 계좌에 예치하도록 명령했다. 이 경우 중재소송 결과에 따라 한국 특허 로열티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카이스트 역시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이스트가 지난해 2월 19일 KIP에 보내 온 공문 ‘삼성전자 협상 타결에 따른 (주)케이아이피 유보금 정리의 건에 대한 회신’에 따르면 미국 중재소송 결과에 따른 한국 특허 로열티 규모의 변동을 수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즉, 폴리나와의 중재소송과 관련해 당시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중재재판소의 본안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3월경, 카이스트에 이광형 총장이 새로 취임한다. KIP와의 업무 협력을 담당하던 부서의 책임자와 담당자도 모두 교체되면서 돌연 카이스트가 기존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이스트가 받게 될 수익의 예상값을 확인하겠다며 제3자에게 공개해서는 안 되는 중재소송의 비공개 자료를 제공하라고 독촉한 것이다.
결국 폴리나 측에서 최소 인원에 한해 ‘비밀유지계약서(NDA)’를 제출할 경우 재판 관련 서류를 열람하는 데 동의했으나 카이스트 측에서 NDA 제출을 거부하며 열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어 지난 3월 2일 카이스트가 돌연 미국 위스콘신주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면서 모회사와 자회사 간의 법정 다툼이 시작된다.
카이스트가 위스콘신 동부연방법원에 제출한 소장 보정본에 따르면 카이스트는 업무협약서, 기본협약서, 핀펫특허 활용수익 배분합의서 위반 등을 이유로 KIP를 제소했다.
문제는 카이스트와 KIP가 맺은 협약서에는 협약 불이행 혹은 위반으로 생기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을 규정한 조항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카이스트와 KIP가 맺은 3종의 협약서에 따르면 양 당사자 간 분쟁이 생길 경우 국내 분쟁 조정 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에 따라 최종 해결하도록 약정돼 있다. 미국 위스콘신 동부연방법원도 이 사실을 결정적 근거로 들어 ‘관할권 없음’으로 공소를 기각한다. 미국 민사법정에서 다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카이스트가 굳이 미국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한 점을 두고 의문부호가 찍힌다. 소송과 달리 조정기관의 중재를 거쳐 합의에 도달할 경우 비용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데도 이를 걷어찬 셈이기 때문이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올해 국정감사에서 “(카이스트는)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규칙을 어기고 미국 소송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2억 원이 넘는 돈을 간접비로 썼는데 이는 국민 혈세를 낭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협약서를 어겨가며 자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행태는 갑질에 해당하고, 이는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이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소송이 기각되면서 2100만 달러가 예치된 US뱅크의 에스크로 계좌 동결 역시 불발됐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카이스트는 국내에서도 소송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카이시트는 10월 6일 KIP의 국내 은행 계좌에 예치된 약 20억 원에 대해 가압류를 걸어둔 상태다. 이와 관련, 강인규 KIP 대표는 “카이스트 측의 일방적인 자료 제출로 압류가 걸린 것이기 때문에 유효하지 않으며, 곧 소명을 통해 풀 예정”이라며 “카이스트가 왜 이미 합의한 상황을 뒤엎고 황당한 소송을 이어나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요신문이 미국에서 폴리나와 KIP의 중재소송 도중 미국 에스크로 계좌 동결을 요청한 이유와 대한상사중재원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기로 협약한 상황에서 소송을 택한 이유에 대해 카이스트 측에 입장을 물었으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카이스트 측은 “미국에서 소송은 기각된 것이 맞지만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는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