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못참아…반란군 대이탈 초읽기
▲ “시스템 공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7일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보복 공천 논란에 대해 “계파 구분 없이 종합적으로 심사한 시스템 공천”이라고 밝혔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새누리당 양천갑 지역에 후보 신청을 했다가 고배를 마신 A 씨는 이번 공천에 대해 ‘박근혜의 보복 공천’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공직자후보추천위원회(공추위) 결과 발표 전날까지만 해도 경선이 실시될 것이라는 말을 핵심 당직자로부터 들었다. 1위 자리를 놓고 여러 후보가 난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전략 공천 지역이 됐다. 알고 보니 후보자로 낙점된 길정우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친박계 인사와 가깝다고 하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서 A 씨가 언급한 인사는 친박계로 분류되는 안명옥 전 의원이다. 안 전 의원은 길정우 후보자의 부인이다. 길 후보자가 양천갑 지역에 전략 공천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의도 주변에서 “치맛바람이 불었다”는 말이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득 의원 지역구인 경북 포항남·울릉에 신청서를 냈던 B 씨 역시 기자와의 통화에서 불만을 쏟아냈다. ‘공천은 곧 당선’으로 여겨지는 이 지역엔 8명이 신청을 했는데 김형태 전 KBS 방송국장이 전략공천자로 선정됐다. 김 전 국장은 신청서 경력란에 ‘박근혜 언론특보’를 기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B 씨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내가 떨어진 게 억울해서가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김 전 국장은 중위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공천 받을 수 있다는 말이냐. 전형적인 밀실 공천”이라고 주장했다. 정장식 전 포항시장 역시 “이번 공천은 여론을 무시한 채 오만에 찬 중앙당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추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전 국장은 1차 여론조사 결과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을 얻었지만 다른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친이계 유정현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공천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유 전 의원은 “여의도연구소에서 3억 원을 들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내가 강북지역 최우수로 꼽혔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바로 폐기된 걸로 안다. 그게 제대로 된 정당이냐”면서 “18대 공천 때도 만행이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일이 4년 후에도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복수가 복수를 낳지 화합을 낳을 수 있나”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전 의원은 지난 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실시된 당내 후보 간 경쟁력 여론 조사에서 37.6%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유 전 의원을 제치고 공천을 받은 친박계 김정 의원 지지율은 3.1%로 4위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로 꼽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분당갑이다. 이 지역에서 전략 공천을 받은 이종훈 명지대 교수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위원장의 대표적인 공약인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만든 자문단 중 한 명이다. 또한 이 교수는 박 위원장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소속이기도 하다. 공추위는 이 교수에 대해 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발표했으나 박 위원장과의 관련성이 알려지면서 친박 인사에게만 적용된다는 ‘묻지마 공천’의 혜택자로 꼽히고 있다.
이밖에 부산저축은행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성헌 의원(서대문갑 공천), 2006년 시의원에게 금품을 건네 벌금 90만 원형을 받았던 서찬교 전 구청장(성북을 공천), 6선으로 용퇴론에 휩싸였던 홍사덕 의원(종로 전략공천) 등도 원칙 없는 계파 공천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전략공천 특혜를 친박이 누리고 있다. (전략공천은) 당의 쇄신의지를 알리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공천을 주자는 취지인데 여야를 떠나 계파 나눠먹기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친이계는 이러한 공천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보복공천’(이재오 의원), ‘닥치고 나가라 식 공천’(정몽준 의원), ‘이적행위에 가까운 공천’(김문수 지사) 등 친이계 중진들은 박근혜 위원장을 겨냥해 포문을 열었다. 공천에 탈락한 4선 이윤성 의원도 “과거 한풀이 기준에 따른 공천학살이 자행되고 있다”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공천 탈락 후 “(박근혜 위원장은) 정체성이 없다. 대통령 병 환자다”라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했던 전여옥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 국민생각에 입당했다.
현재 친이계는 연쇄 회동을 갖고 무소속 연대, 집단 탈당 등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3월 6일 저녁 국회 근처의 한 음식점에선 현역 의원 6명을 포함한 친이계 인사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박근혜 성토장’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의원은 당시 “자꾸 4년 전과 비교하는데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다. 일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박 위원장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면 국민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면서 “이번 공천은 친이에게는 엄격하고 친박에게는 관대한 ‘시스템식 학살공천’”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단 친박계와 공추위는 친이계를 다독이기 위해 진화에 힘쓰는 모습이다. 몇몇 친박 의원들은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양해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 권영세 사무총장도 “낙천자들에게 이미 연락을 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공천 자료를 본인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친이계를 향한 친박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한 친박계 전직 의원은 기자와 만나 “18대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친이계가 많이 국회에 들어오지 않았나. 당연히 탈락자도 친이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제 균형을 맞추는 것일 뿐”이라면서 “계파 간 정면충돌로 비쳐질까 걱정돼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당을 비대위 체제로까지 내몬 게 도대체 누구냐. 당 주류였던 친이계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박 일각에선 이재오·정몽준 등 친이 중진들이 공천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자파 의원들을 챙기기 위해 박 위원장을 압박하려는 꼼수’라며 평가절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처럼 이번 공천을 놓고 계파 간 입장은 엇갈리지만 친박 내부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은 나오고 있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보복 공천이라고 해도 박 위원장이 반박할 말은 없을 것 같다. (박 위원장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노력을 했다면 좋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다”고 귀띔했다. 특히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인사들 중 일부는 “토사구팽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지난 4년간 비주류로서 박 위원장을 보좌해 왔지만 ‘친박 희생’이라는 명목 하에 공천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단순히 희생의 차원이라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해 전당대회 이후 박 위원장이 주류 수장이 되자 친박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범박’, ‘월박’이라는 말도 생겼다. 또한 ‘친박인 척하는’ 의원들도 제법 있었다. 박 위원장 핵심 측근에 의하면 이번 공천에서 살아남은 인사들이야말로 ‘오리지널 친박’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처럼 박 위원장이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순도 100%’ 친박 인사들에게 공천을 줘 친정체제 구축에 힘쓰는 것을 놓고 결국 대선을 염두에 둔 ‘대권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관측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