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든 2인자든 나는 내가 기특해”
▲ KCC에서만 15년을 뛴 추승균이 은퇴를 선언했다. ‘소리 없이 강한 남자’란 별명 덕분에 그는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그리고 올 시즌 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KCC의 4강 진출이 좌절되는 순간, 그는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단어를 끄집어냈다. 바로 ‘은퇴’였다.
1997~1998시즌 KCC의 전신인 현대에 입단 후 15시즌 동안 줄곧 한 팀에서 뛰었던 추승균. ‘마당쇠’ ‘소리 없이 강한 남자’가 그의 선수 시절을 대변한 닉네임이었다면 팬들은 그를 ‘추사마’로 응원하며 코트에서 보여준 열혈 정신에 깊은 박수를 보내고 있다.
3월 15일 은퇴식을 마치고 KCC 최형길 단장, 허재 감독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쉬움을 주고받았다는 추승균은 3월 16일, <일요신문>과의 ‘취중토크’를 위해 강남의 한 이자카야(일본식 선술집)를 찾아왔다.―올시즌이 시작되기 전 전주 만남에서, 은퇴를 하게 되면 꼭 ‘취중토크’를 하자고 얘길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실현되고 말았다. 솔직히 기자인 내가 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나도 실감이 안 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체육관으로 출근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제 은퇴식에 후배들이 모두 참석해줬는데,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마치 결혼식 촬영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웃음). 옆에 와이프만 없었을 뿐이지, 모두 양복을 쫙 빼입고 내 뒤에 줄 맞춰 서 있는 선수들을 보니까 은퇴를 섭섭해 하기보단 축하해 주러 온 후배들 같았다.
―은퇴 결심을 하게 된 진짜 이유가 있는 건가.
▲정상에 있을 때 멋진 모습으로 떠나고 싶었다. 지난해 우승도 했고 1만 점 돌파 기록도 세웠고…, 아쉬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퇴식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나(웃음)? 은퇴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새로운 도전의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다면, 아쉬움, 안타까움보다는 설렘, 기대감 등이 더 생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은퇴는 또 다른 길을 가기 위한 설렘의 순간이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모비스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하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선수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마지막 경기라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전)태풍이가 다치는 바람에 팀 전력을 100% 발휘하지 못해 아쉬웠다. 잘 안 되더라. 플레이오프는 선수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무시 못한다. 올해는 우리한테 그런 운이 잘 안 따라준 것 같다.
―플레이오프 3차전, 마지막 경기를 뛰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성격이 털털한 편이라 마지막 경기라는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은퇴를 즉흥적으로 생각했더라면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았겠지만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라 덤덤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코트보다는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보면 추승균은 잊혀가는 선수로 남는다. 깨끗하게 은퇴하자! 내려놓을 때는 확실히 내려놓자! 이런 마음이었다. 아내는 내가 1년 정도 더 뛰어주길 바랐지만, 결국엔 내 의사를 존중해주더라.
―솔직히 대답해주길 바란다. 올 시즌을 치르며 체력적인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은퇴 결심을 하게 된 게 아닌지 궁금하다.
▲진짜 솔직한 대답을 원하는 건가(웃음)? 그렇다. 겉으로는 ‘괜찮다’라고 얘기하지만 정말 힘들었다. 힘든 경기를 치른 다음날, 회복 속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정말 힘들 때는 새벽 서너 시가 돼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통이 극심해서….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때 부상을 당한 이후 체력이 급격이 떨어졌다. 운동하면서 근육을 다쳐본 적이 없었는데, 그 부상 이후로 체력 회복이 힘들었다. 괴로워하기보단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추락할 것 같아서. 인정한다는 게 쉬우면서도 어려운 거더라.
―1997~1998시즌이 프로 데뷔 무대였다. 신인 때의 추승균은 어떤 모습이었나.
▲대학 때는 공격만 했었다. 농구대잔치 때 득점왕을 했을 정도로. 그런데 프로에 와서 공격적인 성향을 버리고 수비를 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처음 6개월간 내 스타일을 버리고 선배들한테 맞춰가야 하는 부분이 무진장 힘들었다. 조성원, 이상민 선배들 덕분에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농구인생을 93점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점수가 나온 배경이 궁금하다.
▲15년 동안 프로 선수로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걸 이뤘다. 그런 점에서 90점은 좀 아쉬운 것 같고, 100점을 주면 너무 과한 것 같고…. 그래서 93점을 준 것이다. 나머지 7점은 정규리그에서 MVP를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다. 챔피언결정전에서 MVP를 수상해봤는데, 정규리그에서 상을 못 받았다. 우리 집에 있는 트로피 진열장에 정규리그 MVP 트로피만 있으면 딱 인데…(웃음).
▲ 사진제공=전주KCC |
―한때 ‘소리 없이 강한 남자’란 별명 때문에 고민을 했다고 들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프로 첫 해에는 그런 별명이 없었다. 그러다 2년차 되니까 관중석에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더라. 그런데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별로인가? 내 플레이가 화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 별명으로 인해 농구 스타일이나 사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항상 겸손하고 자신을 낮춰 얘기하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보면 그 별명이 나란 놈을 살린 거나 마찬가지다.
―되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을 것 같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베스트5 수상을 두 번밖에 하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우승도 했고 경기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한테 저 베스트5 수상의 기회가 자주 오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원인은 동부 김주성 때문이다(웃음). 주성이가 워낙 뛰어난 플레이를 하니까 주성이한테 묻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니까 손이 참 예쁘다. 농구선수의 손 같지가 않다.
▲이게 내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손이 작고 팔 길이가 짧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손이 작았기 때문에 슛이 더 잘 들어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짧은 팔과 작은 손 때문에 페이드어웨이 슛(골밑 4~6m 거리에서 상대 수비를 등지고 살짝 움직이면서 거리를 측정한 뒤 점프와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면서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쏘는 슛) 연습을 더 많이 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릴 적 친구가 어디선가 동영상을 구해와 보여줬다. 바로 마이클 조던의 경기 비디오였다. 그때 마이클 조던의 페이드어웨이 슛을 보면서 그걸 따라하려고 연습을 많이 했다. 내 페이드어웨이슛의 시작은 마이클 조던의 동영상 덕분이다.
―포워드 치곤 190㎝가 작은 키에 속하는 편이다. 이런 부분을 극복하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을 것 같은데, 어떤가.
▲키가 작다 보니까 수비든 공격이든 커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신인 때 내 체중이 84㎏이었다. 그걸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90㎏으로 늘렸다. 선수들 몰래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혼자 2시간 30분씩 눈물을 흘리며 트레이닝을 받았다. 이렇게 하면 부상이 올 수 있다는 트레이너의 말도 듣지 않았다. 내가 힘이 생겨야지만 코트에서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무식하게 웨이트트레이닝을 했었다. 그 덕분에 잔부상이 생기지 않았다.
▲ 지난해 4월 26일 2010~2011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추승균이 동료 하승진과 함께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등번호 4번이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다. 어떻게 해서 남들이 싫어하는 4번을 달고 뛰게 된 건가.
▲나도 이 번호를 싫어했다. 그런데 프로 들어가서 번호를 고르려다 보니까 맞는 숫자가 없더라. 대학 때 달았던 11번을 쓰고 싶었지만 (이)상민이 형이 달고 있었던 터라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버려져 있는 4번을 쓰게 된 것이다. 나한테는 행운의 번호가 7번이 아닌 4번이라고 마음 속으로 최면을 걸었다. 그런데 그 번호가 나한테 진짜 행운을 안겨주게 됐다.
―‘취중토크’ 자리인데, 술을 너무 안 마셨다. 추승균 선수의 이야기에 취하는 바람에….
▲선수 생활하면서 ‘취중토크’를 처음 해봤다. 이거, 은근히 괜찮은 것 같다. 말이 술술 나오는 게…(웃음).
―마지막으로 ‘추승균이 추승균에게 보내는 메시지’란 주제로 인사를 남겼으면 한다.
▲술 한 잔 마시고 시작하겠다. 흠…, 승균아! (웃음) 27년을 농구 코트에서 살았구나. 힘든 일, 쓰러질 뻔한 일도 많았지만 잘 참고 잘 버텨낸 것 같아 기특하다. 이제 또 다른 길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까 앞으로도 후회 없이, 잘할 것이라고 믿고 파이팅하자. 다시 한 번 멋있게, 새로운 길을 걸어가 보자!
추승균의 은퇴 후 진로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였다. 지도자의 길을 갈 지, 아니면 정말 다른 인생에 도전할 지, 추승균은 계속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무조건 응원을 보내겠다는 인사를 전하며 ‘1차’를 마쳤다. ‘2차’부터는 녹음기 없이 본격적인 술자리가 펼쳐졌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추승균 즉문즉답
“예쁜 이상민, 얄미운 김주성”
Q: 선수 생활하며 배가 아팠던 상대는?
A: 이상민과 김주성. 이상민 선배는 한국에서 가장 예쁘게 패스를 하는 선수였다. 그 선배의 슛을 받은 슈터는 감각적으로 알게 된다. 이런 슛을 패스하는 선수가 이상민 선배밖에 없다는 사실을. 김주성은 나의 베스트5 수상을 저지한 선수라 얄미웠다(웃음).
Q: 추승균을 막으려고 덤벼(?)든 상대 선수들에게 한마디!
A: 그동안 날 때리고 할퀴고 했던 선수들!! 실명은 공개 안 한다! 그러나 나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심판 안 볼 때 날 괴롭힌 선수들을 때리고 잡아당긴 적도 있었다. 미안하다! 진심으로.
Q: 1만 점 기록을 돌파하지 않았더라면 은퇴 시기를 미뤘을 것 같나.
A: 만약 9999개로 시즌을 마쳤더라면 살짝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Q: 선수 시절 때 꼭 한번쯤은 이 감독 밑에서 운동하고 싶었다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A: 부산 KT 전창진 감독님이다. 겉으론 화도 많이 내시고, 선수들을 다그치시는 것 같지만 선수들은 그 감독님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Q: 가장 아쉬웠던 것 네 가지!
A: 후배들에게 많은 걸 전해주지 못한 것, 정규리그 MVP 못한 것, 올해 우승을 하고 은퇴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
Q: 내가 가장 아끼는 것 4가지.
A: 가족, 농구, 옷, 자동차.
Q: 추승균에게 농구란?
A: 한 길만 걷게 해준 소중한 존재? 소신 있게 이 길을 걷게 해준 농구한테 감사한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보니 이 ‘농구’란 놈이 아주 괜찮은 녀석 같다. [미]
“예쁜 이상민, 얄미운 김주성”
Q: 선수 생활하며 배가 아팠던 상대는?
A: 이상민과 김주성. 이상민 선배는 한국에서 가장 예쁘게 패스를 하는 선수였다. 그 선배의 슛을 받은 슈터는 감각적으로 알게 된다. 이런 슛을 패스하는 선수가 이상민 선배밖에 없다는 사실을. 김주성은 나의 베스트5 수상을 저지한 선수라 얄미웠다(웃음).
Q: 추승균을 막으려고 덤벼(?)든 상대 선수들에게 한마디!
A: 그동안 날 때리고 할퀴고 했던 선수들!! 실명은 공개 안 한다! 그러나 나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심판 안 볼 때 날 괴롭힌 선수들을 때리고 잡아당긴 적도 있었다. 미안하다! 진심으로.
Q: 1만 점 기록을 돌파하지 않았더라면 은퇴 시기를 미뤘을 것 같나.
A: 만약 9999개로 시즌을 마쳤더라면 살짝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Q: 선수 시절 때 꼭 한번쯤은 이 감독 밑에서 운동하고 싶었다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A: 부산 KT 전창진 감독님이다. 겉으론 화도 많이 내시고, 선수들을 다그치시는 것 같지만 선수들은 그 감독님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Q: 가장 아쉬웠던 것 네 가지!
A: 후배들에게 많은 걸 전해주지 못한 것, 정규리그 MVP 못한 것, 올해 우승을 하고 은퇴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
Q: 내가 가장 아끼는 것 4가지.
A: 가족, 농구, 옷, 자동차.
Q: 추승균에게 농구란?
A: 한 길만 걷게 해준 소중한 존재? 소신 있게 이 길을 걷게 해준 농구한테 감사한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보니 이 ‘농구’란 놈이 아주 괜찮은 녀석 같다.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