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이름 파는데 회사는 “…”
▲ 전직 현대차 직원 정 씨의 880억대 사기 행각이 드러나자 피해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
이런 와중에 최근 정 씨의 전 직장이었던 현대차의 책임론이 급부상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2009년, 사기행각을 위해 내부문서를 위조한 정 씨의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당시 내부차원에서 정 씨를 해임 처리했으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덮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정 씨가 해임된 이후에도 투자자들에게 해임 사실을 숨기고 전 직장을 드나들며 사기행각을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 씨의 사기행각에 당한 피해자들은 최근 현대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돼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피해자 최 아무개 씨는 지난 2007년 3월경, 지인을 통해 당시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이었던 정 아무개 씨(44)를 처음 만났다. 정 씨는 최 씨에게 “돈을 투자하면 남양연구소 내 매점 6개의 사업권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정 씨는 당시 현대차노조 대의원과 남양연구소 노조 대표직함을 갖고 있었다. 최 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의 직함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대기업 연구소 내부는 보안 문제 때문에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씨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연구소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매점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정 씨에게 3억 원을 투자했다”라고 말했다.
정 씨는 이후에도 피해자 최 씨에게 ‘특판차 사업’이라는 것을 제안했다. 당시 정 씨는 “장기근속자들에게 시가보다 30% 할인받은 가격으로 할당되는 ‘특판차’가 있다. 여기에 투자하면 배당금을 주겠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현대차 안에는 이러한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최 씨는 결국 정 씨에게 현금 4억 5000만 원을 추가로 건넸다. 최 씨는 “실제 투자하고 한동안 배당금 명목으로 일부 금액을 챙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미끼였다. 나 말고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수법으로 돈을 받아 챙겨 일부 금액을 돌려막기 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 씨는 이런 식으로 투자자 100여 명을 끌어들였다. 기자와 만난 담당 수사관에 따르면 정 씨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연구소 내 ‘매점사업권’, 연구소에서 나오는 폐차의 ‘고철사업권’, 그리고 ‘특판차 사업권’ 등을 명목으로 880억 원을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 기자와 만난 일부 피해자 중에서는 정 씨로부터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이 이끌고 있는 CNS테크의 주식을 액면가(500원)에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거액을 투자한 사실도 새롭게 포착되고 있다.
정 씨는 사람들의 믿음을 사기 위해 ‘배당금’이라며 투자자들에게 일부 금액을 송금하는가 하면 현대차 명의의 배당금 지급확약서, 특판 집행 리스트, 정몽구 회장의 편지 등 다양한 위조서류를 꾸미기도 했다. 심지어는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해 현대차 혹은 현대모비스 임원인 양 연극까지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정 씨의 사기행각은 최근 정 씨의 실체를 파악한 한 피해자의 고소로 발각됐다. 명목상으로 나오던 배당금이 완전히 끊긴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한 피해자가 정 씨의 퇴사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고소장을 접수받은 경찰은 곧바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았고 지난 3월 12일 내연녀 집 장롱에 숨어있던 정 씨를 긴급 체포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1억 원가량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정 씨의 계좌에는 이미 돈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정 씨에게 100억 원대 이상 피해를 본 투자자는 4명이나 됐고, 이후 경찰서에는 10건의 고소장이 추가로 접수됐다. 피해자 중에는 유명중소기업 A 회장(피해금액 약 200억 원)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파악된 정 씨의 편취 금액은 880억 원이었지만 피해자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1500억 원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정 씨의 사기사건은 현대차로 그 불똥이 튀고 있다. 단순한 개인 사기사건 치고는 금액이 천문학적이고 어찌됐건 정 씨가 사기행각을 벌이던 시점은 그가 현대차 직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기자와 만난 채권단 대표 이 아무개 씨는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2007년 정 씨는 현대차 소속 직원이었으며 노조 간부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현대차는 2009년 무렵 정 씨의 사기행각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내부 차원에서 해임하는 것에 그쳤다. 해임 뒤에도 정 씨는 회사의 제지 없이 범행의 무대였던 연구소를 자유롭게 드나들기까지 했다. 당연히 현대차도 책임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채권단은 정 씨에 대한 민·형사 소송과 함께 사용자 책임의무와 관련해 현대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채권단은 이미 지난 4월 2일 대형로펌인 법무법인 서정과 계약을 체결하고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다. 기자와 통화한 서정의 담당 변호사는 “현대차 민사소송과 관련해 채권단과 선임계약을 맺은 것은 맞다. 현재까지 소장 작성을 위해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답변했다.
채권단과 현대차와의 법정 공방으로 확전되고 있는 정 씨의 800억 원대 사기사건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