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 반란’ 맹탕 전대가 설설 끓겠네
▲ ‘1강7약’ 아니었어? 민주당 당권 향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일각에선 김한길 후보(왼쪽)가 이해찬 후보의 독주를 저지하고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조사를 의뢰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시돼 있지 않았으나 조사 기관은 ‘한국인텔리서치’, 조사 시기는 5월 17일, 조사 방법은 ARS(자동응답전화시스템)를 이용한 전화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최대허용오차가 ±1.4%포인트로 돼 있었다. 이 조사에서 1위는 친노(친노무현)그룹의 이해찬 후보였다. 1순위 투표에서 29.9%, 2순위 투표에서 9.2%의 지지를 얻어 평균 18.75%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2위는 김한길 후보로, 1순위 투표에서 18.6%, 2순위 투표에서 20.6%를 얻어 평균 지지율이 17.80%였다. 이른바 ‘이해찬-박지원 역할분담’을 통해 친노그룹과 호남그룹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이해찬 후보가 김한길 후보에 불과 0.95%포인트 앞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도자료에는 “지역위원장의 ‘오더’대로 움직이는 조직표의 성격이 강한 대의원 조사 결과에서 박빙의 승부를 보이고 있다”며 “반 이해찬(문재인) 유력 대권후보인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정동영 등이 자신의 계파에 오더를 내릴 경우 지지율은 상당한 격차로 역전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분석까지 달려 있었다.
이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면 ‘이 -박 연대’를 ‘담합’이라고 비판하면서 ‘이해찬 대항마’를 자처해 온 김한길 후보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는 셈이다. 또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확인됐던 ‘이-박 연대’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 기류가 이번 전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조사 결과를 두고 “김한길 후보 측이 조사한 것 아니냐”, “조사 결과에 바이어스(편향)가 있을 수 있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민주당 관계자들과 출입기자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 전대 판세를 두고 당내에선 ‘이해찬 독주 양상’으로 치러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최근 동료 3명과 함께 술자리에서 전대 판세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처음엔 ‘2강 3중 2약’이라는 주장과 ‘2강 2중 4약’, ‘1강 3중 4약’ 등의 주장이 맞섰는데 술자리가 파할 무렵엔 ‘1강 7약’으로 정리됐다. 여기서 ‘1강’은 당연히 이해찬 후보다. ‘이-박 담합 논란’ 속에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결국 박지원 후보가 당선됐던 것처럼 이번 전대도 그렇게 갈 것으로 봐야 한다는 거다. 더욱이 이번 전대는 선거인단이 80만 명에 육박했던 1·15 전대 때와 달리 여론의 관심도 끌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조직선거로 가면 당연히 이해찬 후보가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번 전대 판세가 ‘이해찬 독주’ 양상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대에 출마한 다른 후보자들조차 “1등은 이해찬이고…”라며 대세론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한 486세대 후보 선거캠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관계자는 “이번 전대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1등이 되느냐가 아니라 누가 2등이 되느냐와 누가 2명의 탈락자에 포함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 전대가 이처럼 ‘맹탕 전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이유는 통합진보당(통진당) 내분 사태로 인해 언론의 주목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월 2일 “4·11 국회의원 총선거 비례대표 후보자 경선은 총체적 부실·부정선거였다”는 당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모든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은 통진당으로 향했다. 신문과 방송 가릴 것 없이 통진당 사태에 매달리는 통에 민주당 전대는 초장부터 기사 한 줄 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더욱이 당내 대선주자들이 전대에 ‘올인’하기보다는 몸을 사리는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이해찬 대세론’은 더 힘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출전 선수’의 면면을 봐도 이번 전대에는 이해찬 후보 외에 특정 대선주자의 대리인으로 볼 만한 후보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종걸 후보가 친정동영, 조정식 후보가 친손학규, 강기정 후보가 친정세균계로 통하지만 이들을 각 대선주자들이 내놓은 ‘최선의 카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한길, 추미애, 우상호, 문용식 후보 등은 상대적으로 계파 색깔이 약한 편이다.
대선주자들이 이처럼 몸을 사리는 이유는 이번 전대를 통해 선출될 지도부의 역할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1·15 전대를 통해 선출됐던 지도부는 4·11 총선 공천권을 쥔 막강한 지도부였지만, 이번 지도부는 ‘100일 천하 지도부’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당직자는 “9월쯤 대선후보가 선출되면 그때부턴 모든 권력은 대선후보에게 집중된다”면서 “이는 대선에서 승리해도 마찬가지고, 혹시 패한다면 제일 먼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당대표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주자들로선 가장 중요한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실익도 없는 일에 힘 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내릴 만하다.
대선주자들의 소극적 행보, 실체가 잡히지 않는 ‘반 이해찬 연대론’ 등으로 인해 ‘이해찬 대세론’이 굳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대의원 여론조사 결과 공개는 전대 판세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 대세론’이 꺾이는 순간 누가 1등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분야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일하는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우리가 실시한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이해찬 후보와 김한길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경합하는 것으로 나왔다”면서 “김 후보가 1인2표제로 치러지는 이번 경선 룰의 혜택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해찬 대세론’이 흔들린다는 것은 비단 이번 전대에만 영향력이 미치는 게 아니다. 이해찬 후보는 누가 봐도 차기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상임고문이 내놓은 카드이기 때문이다. 문 고문은 ‘이-박 연대’ 과정의 주역은 아니더라도 조역은 맡았었다. ‘이-박 연대’ 사실이 전해졌을 때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고문까지 ‘담합’에 끌어들인 것은 당에 큰 누가 될 것”이라던 민주당 내 원로급 인사들의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