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지원사격한 ‘베일 속 실세’
▲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번 비례대표 부정 경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으로 ‘배지’를 달게 된 이석기 당선자(50)다. 이 당선자는 통합진보당 내에서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그동안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통합진보당 내의 ‘실세 중의 실세’였음을 짐작케 한다는 평가도 적지않다.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의 장본인 이석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았다.
지난 3월 18일 통합진보당 비례 대표 경선을 통해 이석기 당선자가 1위를 기록했을 때 당내에서도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통합진보당 비당권파의 한 관계자는 “공개석상에서 얼굴을 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실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경선에서 1위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몫인 비례대표 1번은 여성명부 1위를 차지한 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이 배정받았고, 이석기 당선자는 2번을 배정받았다.
이석기 당선자는 당권파의 핵심 세력인 ‘경기동부연합’ 소속으로 그 핵심 실세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잇따른 사퇴 요구에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의 통합진보당 관계자는 “비당권파에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이석기라는 인물의 존재감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이었다. 이석기 당선자는 당권파 내에선 이정희 전 대표 이상의 무게감을 가진 것 같았다. 이정희 전 대표는 오히려 들러리라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설명했다.
당권파의 핵심 실세로 알려진 이석기 당선자는 왜 그동안 당내 인사들조차 그 존재를 잘 모를 만큼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걸까. 이는 이 당선자가 당내 활동에 앞장서서 나서기보다는 후미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당선자가 CNP전략그룹(지난 2월 CN커뮤니케이션즈로 상호 변경)의 대표를 맡으며 민주노동당 선거의 컨설팅을 맡았던 이력과 관련이 있다. 이 당선자는 ‘민혁당 사건’(민족해방(NL)노선 학생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씨가 1991년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와서 만든 지하정당인 민혁당이 1999년 국가정보원에 적발된 사건)으로 2002년 5월 구속돼 1년 정도 복역한 이후 CNP전략그룹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 인사들의 선거기획 및 컨설팅 사업을 도맡다시피 해왔다.
이에 관해 이번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이청호 부산 금정구 의원은 지난 15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현 CNP전략그룹 대표인 금영재 씨와 지난 4월 나눴다는 통화 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금 씨는 이 당선자의 당내 위상에 대해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직업적으로 선거에 나가는 사람이 있고, 뒤에서 서포트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당선자는 10여 년 동안 서포트를 해주고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이라며 “이 당선자는 감옥을 갔다 온 뒤에도 신념을 잃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 내부 결정에 따라 후보로 낸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 당선자는 자신이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같은 존재’라고 언급된 데 대해 “그 함의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비례대표 경선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었다는 것”이라고 해명했고, ‘10년간 경기동부연합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소설이며 전혀 사실과 다르다. (통합진보당이 이론 파트와 얼굴 파트로 나뉘었다는 것도) 당원, 대중에 대한 무례다. 조·중·동이 만들어낸 진보당에 대한 모욕”이라고 답한 바 있다. 한편 금 씨는 이청호 구의원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당선자가 CNP전략그룹의 대표로서 민주노동당 및 진보진영과 맺어왔던 관계를 들여다보면,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과거 CNP전략그룹에 선거 전략 및 홍보 컨설팅을 의뢰했었다는 구 민주노동당 출신의 한 인사는 “진보진영 특히 민주노동당 관련 행사나 선거 사업은 으레 CNP(전략그룹)를 통해 자문을 받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단순한 사업적 관계를 떠나 이념적 배경 및 논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신뢰가 두터웠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2005년 2월 설립된 CNP전략그룹은 초반에는 대학 학생회 사업 및 대학 연수회 등의 사업을 주로 해오다가 2007년 이후 본격적인 선거 관련 사업을 해온 바 있다. 2007년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의 선거기획을 담당했고 2009년엔 김상곤 경기교육감 후보의 광고대행업을 하기도 했었다.
CNP전략그룹이 단순한 선거업무를 도운 외부 ‘하청업체’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았던 데에는 이 당선자에 대한 당원들의 신뢰와 그가 주장한 ‘이론적 배경’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앞서의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는 “이석기 당선자는 진보진영 통합 및 연대에 대한 구상을 오래전부터 해왔고 이 점이 선거 전략에 반영되었다. 당세가 열악한 진보진영 인사들도 통합과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CNP전략그룹의 컨설팅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CNP전략그룹이 민주노동당의 사업을 독식하면서 당내 당권파의 자금줄 역할을 해온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한 일간지가 ‘CNP전략그룹이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들의 명함, 인쇄물, 컨설팅 등을 독점하면서 30억 원의 수익을 거뒀다’고 보도했고, 다른 매체는 ‘CNP전략그룹이 지난 2005년 2월 설립 후 2011년 12월 말까지 총 120여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CNP전략그룹은 전국 단위의 선거가 있던 해(2008년 20여억 원, 2010년 40여억 원)에 매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선거 때마다 CNP전략그룹에 ‘일감’을 몰아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 이석기 당선자는 이와 같은 특혜 의혹에 대해 “옛날에 진보세력이 선거하면 다 빚이다. 운동권과 거래해서 돈 번 데가 없다”고 반박했으며, ‘CNP전략그룹이 당권파의 자금줄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선 “엄청난 누명이고 모함”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민혁당 활동으로 복역 중이던 이석기 씨가 2003년 6월 24일 특별휴가를 받은 뒤 동료 하영옥 씨를 만나 반가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석기 당선자 역시 강기갑 비대위원장의 사퇴 독려를 거부한 채 당내외의 강력한 반발에도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김재연 당선자와 함께 서울시당에서 경기동부연합 세력이 강한 경기도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실이 밝혀지기도 해, 출당 조치에 강하게 맞서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강수가 어디까지 갈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이 당선자 운동권 이력
민혁당의 전신 만들어
이석기 당선자는 어떻게 당권파의 ‘수장’과 같은 위치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이 배경을 살펴보려면, 과거 그의 한국외국어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석기 당선자(82학번) 외에도 김재연 당선자(99학번), 우위영 당 공동대변인(84학번), 정형주 전 민노당 경기도당위원장(84학번), 김기창 전 민노당 성남시협의회의장(85학번), 이양수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직실장(85학번), 윤용배 전 경기동부연합 공동의장(86학번), 편재승 전 민노당 사무부총장(87학번), 윤원석 전 민중의소리 대표(86학번) 등이 모두 외대 출신이다. 특히 이석기 당선자와 윤원석 전 대표, 정형주 전 위원장이 나온 외대 용인캠퍼스 출신들은 현재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에 대거 진출해 있다.
외대 용인캠퍼스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배출’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981년 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문을 연 외대 용인캠퍼스에는 초반 각종 운동권 분파들이 경쟁하며 세를 불려갔다고 한다. 또한 당시 외대의 교풍이 매우 개방적이어서 학생들이 입학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운동권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80년대 초반 외대 용인캠퍼스를 다녔던 한 직장인은 “각종 운동권 분파들이 신입생들을 먼저 유치해 가기 위해 경쟁했고, 대학에 진학한 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운동권 문화를 접하고 쉽게 빠져드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1982년 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한 이석기 당선자는 주축 운동권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NL(민족해방·범주체사상) 사상을 키워갔다. 불법시위로 인한 제적과 재입학 끝에 1988년 8월 졸업한 이 당선자는 이듬해인 89년 3월 하영옥 씨 등과 함께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이 조직은 ‘주체형의 새 세대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단련시킨다’는 내용을 강령으로 담았다. 곧이어 조직에 합류한 김영환 씨가 그 뒤 이 조직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개편하게 된다.
이후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 씨가 결국 1997년 7월 민혁당 공식 해체를 선언하자, 조직 재건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이가 하영옥 씨와 이석기 당선자였다고 한다. 민혁당의 실체는 1998년 여수에서 발견된 북한 반잠수정에서 하 씨가 북한 간첩과 연루돼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드러났고, 하 씨를 포함한 관련자들이 모두 검거됐으나 이 당선자는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2년 5월에서야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석기 당선자는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난 뒤 경기동부연합 출신인사들과 함께 당권파의 사업을 맡으며 2005년 2월 ‘CNP전략그룹’을 만들게 된다. [조]
민혁당의 전신 만들어
외대 용인캠퍼스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배출’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981년 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문을 연 외대 용인캠퍼스에는 초반 각종 운동권 분파들이 경쟁하며 세를 불려갔다고 한다. 또한 당시 외대의 교풍이 매우 개방적이어서 학생들이 입학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운동권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80년대 초반 외대 용인캠퍼스를 다녔던 한 직장인은 “각종 운동권 분파들이 신입생들을 먼저 유치해 가기 위해 경쟁했고, 대학에 진학한 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운동권 문화를 접하고 쉽게 빠져드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1982년 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한 이석기 당선자는 주축 운동권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NL(민족해방·범주체사상) 사상을 키워갔다. 불법시위로 인한 제적과 재입학 끝에 1988년 8월 졸업한 이 당선자는 이듬해인 89년 3월 하영옥 씨 등과 함께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이 조직은 ‘주체형의 새 세대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단련시킨다’는 내용을 강령으로 담았다. 곧이어 조직에 합류한 김영환 씨가 그 뒤 이 조직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개편하게 된다.
이후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 씨가 결국 1997년 7월 민혁당 공식 해체를 선언하자, 조직 재건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이가 하영옥 씨와 이석기 당선자였다고 한다. 민혁당의 실체는 1998년 여수에서 발견된 북한 반잠수정에서 하 씨가 북한 간첩과 연루돼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드러났고, 하 씨를 포함한 관련자들이 모두 검거됐으나 이 당선자는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2년 5월에서야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석기 당선자는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난 뒤 경기동부연합 출신인사들과 함께 당권파의 사업을 맡으며 2005년 2월 ‘CNP전략그룹’을 만들게 된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