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토끼와 하얀 고양이, 선글래스를 쓴 노랑머리 소녀가 애드벌룬을 타고 하늘을 날아간다. 숲과 강을 지나 먼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미식축구 경기를 하는 토끼가 사자의 강력한 태클을 피해 터치다운에 성공했다. 뒤에서는 금발머리 소녀가 치어리더 복장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고양이와 토끼, 소녀가 록 밴드를 결성해 공연 중이다. 여러 동물들이 환호한다.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동화적 발상의 그림이다. 환상적이며 코믹한 설정이 최근 회화의 흐름과 맞닿아 있어 주목받고 있는 안정모의 작품들이다.
만화책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유쾌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단순히 유쾌한 상상력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웃음을 머금게 하는 가벼운 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의외로 묵직하다.
안정모가 토끼 캐릭터를 만들어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면서 붙여준 이름은 ‘매드 토(Mad toe)-미친 발가락’이다. 토끼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작명이다.
작가는 “토끼가 못된 동물들에게 괴롭힘 당하다 죽은 후 빌런으로 환생하여 강한 동물들을 응징할 때 발길질을 잘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설명한다. 스토리를 연속적으로 작품화하는 안정모의 그림에서 매드 토는 슈퍼 히어로 역할을 담당하는 주인공이다. 약하고 온순한 토끼에게 영웅 대접을 하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안정모가 일종의 블랙 유머를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를 서슴없이 소화해내는 안정모의 토끼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인간상임을 짐작케 한다.
어떤 인물일까. 별 볼 일 없는 인간상일 게다. 특별한 재능이나 출중한 외모와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 어쩌면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외 계층에 가까운 사람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현실을 살아가는 데 힘겨운 사람들. 이들은 슈퍼 히어로를 꿈꾼다. 버거운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자기 최면 같은 심리다.
영웅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다. 현실에서는 늘 패배하지만, 그것을 만회해주는 존재를 마음속에 심는 것으로 우리는 힘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대리 만족인 셈이다.
작가가 약한 토끼를 의적과도 같은 악당 히어로로 만든 이유도 같은 심정이다. 안정모 작품이 주는 위안도 같은 맥락이다. 토끼처럼 취급되는 현실이 역전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통쾌함을 주는 인생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는 그림이다.
위로나 격려를 넘어 통쾌함까지 주는 그림에는 힘이 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힘이다. 그래서 안정모의 동화 같은 그림이 인기가 있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