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정대근 아무리 잘 통하는 사이라곤 해도…
▲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왼쪽),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 ||
농협중앙회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40조 5000억 원, 여·수신 규모는 각각 87조 원, 100조 원으로 국민은행에 이어 은행권 2~3위에 해당하는 ‘공룡’이다. 이 공룡 조직의 수장인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에 대해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는 지난 11일 서울 양재동 농협중앙회 사옥 매각때 현대차그룹으로부터 3억 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정 회장은 12일 구속수감됐다.
하지만 정 회장 주변에선 검찰이 주장하는 혐의를 부정하고 있어 정식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그의 ‘혐의’에 대해서 속단할 수 없다. 이는 현대차 본사로 사용되고 있는 농협의 양재동 사옥 매각부터 현대차 비자금 수사건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고리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농협의 양재동 사옥은 지난 99년 말 완공됐다. 당시 정 회장은 전임 원철희 회장에 이어 농협중앙회장에 선임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농협은 야심차게 새로 지은 양재동 사옥을 완공하자마자 매물로 내놓았다. 때문에 양재동 사옥 매각 자체를 두고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당시 정부 고위층에서 외환위기 직후 농민들 사정이 어려운데 농협이 경부선 입구에 ‘호화 건물’을 또 갖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내려오자 농협이 부랴부랴 나섰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어쨌든 농협은 그해 12월 ‘재무구조 개선’과 ‘중복 자산 매각차원’에서 이 건물을 완공하자마자 공개매각했다. 2000년 1월, 3000억 원에 공매에 부쳐진 이 건물은 6번의 유찰 끝에 현대차에 2300억 원에 팔렸다. 매매 조건은 매매대금의 50%를 선납하고 나머지 50%는 5년간 분할 상환하는 조건. 현대차는 계약 뒤 매입금액의 65%에 달하는 1495억 원을 담보대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선 이런 과정에서 정대근 회장이 현대차로부터 ‘3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농협 안팎에선 ‘그 돈을 정 회장이 현대차 측에 돌려주고 영수증까지 받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야 진위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재계 일각에선 정 회장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친분관계가 ‘돈으로 접대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두 정 회장이 수시로 골프를 칠 만큼 개인적인 친분이 돈독하다는 것이다. 돈으로 로비하고 접대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2005년 11월 싼타페 신차 발표회 때 정몽구 회장은 6년 만에 현대차 신차 발표회를 직접 주관했다. 그때 현대차에선 정 회장 주관의 행사를 빛내기 위해 한덕수 경제부총리, 추병직 교통부 장관, 주한외교사절 등 국내외 VIP를 초청해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다. 그날의 자리배열은 독특했다. VIP급 요인 30여 명에게만 자리를 배정하고 나머지 초청인사들은 모두 서서 행사를 관람하는 스탠팅 파티형 행사로 진행됐다.
맨 앞줄에는 정 회장과 부총리, 국회부의장, 장관, 주한외교사절대표 등이 자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 배치는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의 자리였다. 그는 앞줄 오른쪽 편에 자리를 배치받았고 이는 은행을 포함한 국내 금융기관 중 가장 상석이었고 정치인이나 외교사절을 빼곤 가장 높은 순위였다. 행사장에 들어서면서 정 회장의 환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는 현대차 측에서 정대근 회장에게 극진한 예를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정몽구 회장과 정대근 회장의 친분을 묻는 질문에 농협 측에선 “정대근 회장이 여섯 살 어리지만 두 분이 배포도 맞고 친하게 지낸다”고 대답했다. 이번 수사에서 두 사람의 ‘개인적인 친분’ 외에 현대차가 농협에서 1400억 원대의 대출을 받은 사업적인 관계도 있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일각에선 국내 최대 그룹 오너인 정몽구 회장이 선출직인 농협중앙회장에게 3억 원의 뇌물을 주고 회사 행사장에 불러다놓고 ‘환심’을 사려했다는 것은 재계의 통례로 보면 납득이 안가는 상황이라는 지적도 있다.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뿐더러 현대차의 주거래은행은 외환은행으로 정대근 회장을 굳이 상석에 따로 배려할 만한 이유는 없다.
또 한 가지 의문의 상황은 매각 당시 현대차의 책임자. 검찰 쪽의 전언에 따르면 금융로비스트 김재록 씨는 애초 현대그룹에서 독립선언을 한 현대차의 새 사옥 마련 프로젝트에 관여했지만 이후 현대차쪽에서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며 독자적으로 사옥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대차의 기획실 상무로 활약한 인물과 고 이준원 파주시장. 이 시장은 2001년 3월 현대제철로 발령나기 전까지 양재동 현대타운 프로젝트에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2년 현대차에 사표를 내고 한나라당 소속으로 파주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2004년 6월 그는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서 수뢰사건 혐의로 조사를 받다 한강에서 투신자살했다.
공교로운 점은 이번 현대차 비자금 수사의 발화점으로 알려진 곳도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이라는 점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글로비스 관련 비리 제보가 고양지청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이준원 시장 사건 수사 때 이미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단초가 잡힌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눈길을 끄는 점은 검찰에서 정대근 회장에게 구속 영장을 청구하면서도 누가 정대근 회장에게 돈심부름을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검찰은 전달자가 김재록 씨나 김동훈 씨 등 그간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서 이름이 들먹여진 ‘거물’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정몽구 회장이 정대근 회장을 지목했을 가능성도 낮다.
농협은 최근 몇 년간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 2월에는 세종증권을 인수해 NH증권으로 이름을 바꿔 오는 2010년까지 메이저급 증권사로 키운다는 꿈을 가시화시켰고, 최근에는 국내 최다 사용자를 거느리고 있는 LG카드의 강력한 인수후보자로 올라있는 상태다. 농협이 LG카드까지 인수할 경우 농협은 사실상 국내 금융사 빅3에 들어가게 된다. 때문에 정대근 회장은 최근까지도 카드 사업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었다.
하지만 농협의 꿈에 돌발 변수가 생겼다. 정대근 회장이 구속될 경우 정 회장이 선두에서 추진했던 농협의 금융그룹화 꿈이 반쪽으로 끝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대근 회장이 검찰의 주장대로 1300억 원대에 이른다는 현대차 비자금의 ‘용처’ 수사의 시작인지 끝인지 재판 결과가 주목된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