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본선용 자금 모으기’ 정말?
▲ 새누리당 4·11 총선 공천헌금 파문이 확산일로로 치닫자 박근혜 캠프가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사진은 박근혜 후보가 9일 김천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에 참석한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더구나 이명박 정권 내내 측근들의 비리전횡으로 큰 실망감을 느낀 국민들 사이에서 ‘박근혜가 집권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실망 여론이 확산되면 대세론 자체도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일부 친박계 측근들의 무분별한 충성경쟁이 공천헌금 사건과 같은 악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할 경우 대권도 물 건너 갈 것이라는 위기감도 깊어지고 있다.
권력 주변에는 필연적으로 돈이 모여든다. 돈과 권력은 후진정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차명으로라도 보험금을 걸어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특히 차기 집권이 가장 유력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 주변의 경우 이런 ‘돈 베팅’ 사례가 음성적으로 상당히 만연돼 있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견해다.
이번 공천헌금 사건도 박 전 위원장의 책임 여부를 떠나 차기 1순위 권력에 줄을 대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금-권유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새누리당의 친박계 핵심의원들과 그 주변 인사들은 박 전 위원장의 대권 승리를 위해 저마다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핵심측근들이 소위 말하는 ‘스폰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대가를 약속해주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기환 전 의원 사태의 경우 공천보장이 그 ‘대가’가 되겠지만 현재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는 일부 친박계 정치인들의 자금모금 사례를 보면 ‘박근혜 집권’을 상정한 일종의 권력 나눠먹기 행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민주통합당의 강기정 최고위원은 이번 공천헌금 사건에 대해 “새누리당에서 벌어지는 돈 공천 문제는 사당화된 박근혜식 과거 정치의 총체적인 결정판이다. 재력가 현영희 의원의 돈이 박근혜 후보 사단을 감싸고 보호하는, 실질적으로 박근혜 스폰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이번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친박계의 한 전직의원 A 씨 사례를 통해 박근혜 전 위원장 주변에 퍼져 있는 일부 측근들의 왜곡된 자금모집 행태를 접해볼 수 있었다. A 씨는 친박계 소속이지만 공천을 따낼 만한 핵심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 18대 선거에서 친박계 핵심의 ‘공천헌금’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이 과정에서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친박계 핵심인사가 수억원의 ‘공천헌금’을 요구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어렵사리 금배지를 다는 데는 성공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번 19대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절치부심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에게 이번 12월 대선은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 같은 거액을 버는 직업인이 아닌 그로서는 사무실 운영 등의 최소경비 마련도 버거운 상황이다. 그래서 ‘스폰서’를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이때는 ‘박근혜의 이름으로’ 접근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 박근혜 전 위원장이 지난 2월 2일 현기환 전 의원에게 공천심사위원 임명장을 전달하는 모습. 일요신문 DB |
“전직의원 친박계 A 씨는 지인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지원해줄 스폰서를 찾고 있다고 한다. 그는 스폰서가 될 만한 사람에게 접근해 ‘여의도에 있는 사무실 운영경비로 한 달에 1500만 원만 지원해주면 된다. 대선 때까지 6개월 정도다. 이번 대선 때 내 지역구에서 6만 표 정도만 모으면 박근혜 전 위원장을 확실히 도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박 전 위원장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 덕으로 다음 지방선거 때 수도권의 시장 공천을 따낼 수 있다. 시장이 인허가권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만 되면 나중에 땅 정보 등도 알려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자금 지원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이렇게 ‘대가’를 약속하고 스폰서를 구하는 관행은 현재 정치권 전반에 만연돼 있는 대표적인 구습이다. 그런데 집권이 유력한 정치세력일수록 그 유혹이 더 심한 편이다. 대선이 4개월 정도 남았지만 지금부터 대선 공헌을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을 때 순식간에 뒤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핵심 측근들을 과열경쟁으로 내몰고 있고, 그 과정에서 검은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일부 핵심 측근들의 충성경쟁 과열의 이면에는 박 전 위원장의 어정쩡한 대응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실제로 친박계 핵심 의원들이 지난 총선 과정에서 공천과 그에 얽힌 돈 문제 등으로 당 안팎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박 전 위원장은 결국 그들을 쳐내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소장파의 한 인사는 “박 전 위원장이 친박 핵심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공헌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끝까지 그들을 자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민감한 돈 문제도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오세훈 정치자금법’이 돈줄을 옥죄고 대기업과의 유착 경로가 점점 협소해지면서 핵심인사들이 직접 발로 뛰며 돈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박 전 위원장도 그런 문제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뛸 순 없지 않은가. 친박계 핵심인사들의 전횡이 계속 문제가 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도 돈과 얽혀 있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더구나 이번 공천헌금 사건과 관련해 부산지역 정가에서는 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한 지역 출신 정치인은 이에 대해 “현기환 전 의원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거액을 모금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는 공천헌금은 명분이었을 뿐 대선 본선을 위한 자금 축적이었다는 얘기도 나온다(실제로 민주당 김한길 최고위원은 ‘친박계 핵심에 의한 공천장사는 새누리당의 12월 대선자금 저수지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검찰이 용감하게 답해줘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 전 위원장의 신임을 받는 핵심인사들이 이심전심으로 그를 위해 자금 모으기에 나서는 과정에서 배달사고 등이 발생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에서는 새누리당 공천헌금 사건이 이번에 드러난 것만 3억 원 정도일 뿐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헌금’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박 전 위원장 측 자금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은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어른’(박 전 위원장)을 위해 스폰서를 구하며 비밀활동을 했던 최측근그룹의 한 인사 H 씨도 최근 거액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구설수에 올랐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친박계의 한 핵심 당직자가 주변으로부터 H 씨 관련 질문을 계속 받자, ‘뭐긴, 돈 문제지’라며 큰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안다. 앞으로 새누리당에서 제2의 현기환 사태가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번 공천헌금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전 위원장이 직접 관여했다는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측근들의 과열 충성경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 전 위원장이 이번 사태에 대해 완전히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1인 지배구조가 그 어떤 정당보다 단단하게 뿌리박힌 현재의 새누리당 권력구조상 측근들의 도를 넘는 자금관련 충성경쟁은 집권 뒤 더 심각한 비리로 확대될 수 있다.
전계완 MBN 정치아카데미 대표는 이에 대해 “박 전 위원장이 진정으로 집권을 원한다면 측근들의 경쟁적인 자금 모으기 행태 등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대선 후보가 되기도 전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만약 집권했을 경우 대선 때 공을 세운 측근들이 너도 나도 보은 차원에서 챙겨주려고 하다가 더 큰 비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천헌금 사건으로 박 전 위원장의 집권 신뢰도에 금이 간 건 사실이다. 측근들 19명이 구속된 이명박 정권과 어떻게 해서든 차별화를 시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공천헌금 사건은 최악의 사태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집권해도 측근들 비리는 별 차이가 없겠구나’라는 부정적 여론이 확산될 경우 그의 대선 레이스에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박 전 위원장의 클린이미지에도 오점을 남기고 있다. 이는 불법자금과 같은 사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도권의 중도층 민심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친박계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부 소장그룹 사이에서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이렇게 밀려서는 안 된다. 본선 준비용으로 마련해둔 긴급 위기 대응책을 미리 내놓자’라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총선 때부터 문제가 됐던 친박계 일부 핵심 인사들의 물갈이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만약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사태를 질질 끌 경우 대선 본선까지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자금과 권력의 부정한 결합은 돈을 받는 쪽에 1차적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돈으로 구워삶아 한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권력 주변의 부나방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한국정치의 불치병이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공천헌금 위기는 그에게 더없는 기회로 다가갈 수 있다. 과연 박근혜 전 위원장이 그 악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