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의 시작을 대략 3만 년쯤으로 본다면 2만 9500년 정도를 온전히 신에 의존해왔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신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성이라는 인간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성은 그동안 신의 영역으로 미뤄 놓았던 문제들을 하나둘 꺼내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게 과학이다. 과학이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학은 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떠올랐다. 현재 우리가 진입한 제4차 산업혁명시대는 과학이 지배하고 있다.
과학은 기계문명을 통해 현실적 마법을 보여주었다. 상상으로만 꿈꿨던 일들을 실현했다. 육중한 기계가 수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가 하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게도 해주었고, 바닷속 깊숙이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과학은 해내고야 만 것이다.
과거 신을 섬겼던 예술에서도 과학은 새로운 메시아로 대접 받는다. 미술에서도 그렇다. 20세기 초 미술가들은 과학의 엄청난 위력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과학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창작력의 원천을 과학의 위대한 아들인 기계 문명에서 찾기도 했다. 과학적 원리를 응용한 키네틱 아트와 과학 생산물을 예술화한 비디오 아트가 대표적인 경우다.
미술에 과학적 사고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키네틱 아트는 움직임을 뜻하는 그리스어 ‘키네시스’에서 나온 말이다. 작품을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넣는 미술로, 주로 조각이나 물체를 배치해 공간을 구성하는 설치미술로 표현된다. 미술가의 상상력이 과학의 힘으로 현실화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이다.
서동진도 기계의 힘으로 새로운 개념의 조각에 도전하는 작가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한 드로잉과 3D 프린팅 기법으로 팝아트 풍의 조각을 만든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조각은 제작 방법 자체부터 기존 개념을 뒤집는다. 조각은 작가의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노동에 의한 제작 기술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숙련된 손재주에 의한 기술적 완성도를 작품성의 척도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는 재능이 예술적 아이디어 못지않게 중요하게 대접 받았다.
이런 관점에서 서동진의 조각은 파격이다. 그는 조각의 밑그림이 되는 컴퓨터 그래픽 작업만 할 뿐이다. 이를 입체적 조각으로 구현하는 것은 기계다. 작가는 기계에 자신이 컴퓨터로 그린 이미지를 구현하도록 명령을 주입하는 것으로 제작의 임무를 다한다. 물론 3D 프린팅으로 제작된 입체 형상을 다듬고 색채를 입히는 등의 마무리 작업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서동진이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고글을 쓴 만화풍의 인물들이다.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글은 “현실에 대처하는 현대인의 방어기제를 의미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백소연 웹디자이너 maxdesig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