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개입 의혹, 박정희도 눈감아줬다”
▲ 최태민 목사가 1977년 1월 19일 새마을 국민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
7개의 이름을 쓰고 5번 결혼했다고 알려진 고 최태민 목사. 그는 직업만도 황해도 순사, 강원도 경찰, 육군 및 해병대 헌병대 비공식 문관, 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개운중학교 교장,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등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최 목사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경력들보다 그가 박근혜 대선후보와 ‘스캔들’이 불거진 거의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대선경선 때도 최태민 목사와의 스캔들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당시 ‘박근혜 X파일’로 명명됐던 문건에서는 79년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수사기록도 공개됐지만 경선이 끝나고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문건과 함께 최 목사가 살아있을 때 발표됐던 각종 자료와 기사 등을 토대로 그의 삶을 따라가 봤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간 이루지 못하고 바라고 바라던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 人乃天(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장소 : 대전시 대흥동 현대예식장…(이후 생략)’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 4면 하단에 실렸던 광고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칙사’란 고 최태민 목사(1994년 5월 사망)를 말한다. 당시 방민이라는 이름을 쓰던 최 목사는 이 광고로 처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70년대 초 영세교 교주인 최 목사는 주로 대전에서 종교 활동을 벌였지만 1973년 11월 서울까지 진출해 서대문구 대현동에 16평 규모의 전세를 얻어 교세를 확장시켰다.
사이비종교연구가인 탁명환 한국종교문제연구소장(1994년 사망)은 수년간 최 목사의 이단 행적을 추적해 왔다. 유신 정권 당시 비사를 기록한 <태자마마와 유신공주(김수길 저:간석출판사 출간)>에 따르면 탁 소장은 앞서의 광고를 보고 최 목사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 만남에서 최 목사는 자신을 ‘원자경’이라고 소개했다. 최태민 목사를 만난 이후 탁 소장은 “그는 숙소 벽면에 그려진 둥근 원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했다”며 최 목사의 이단행적 가능성을 언급했다.
최태민 목사는 1912년 5월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최도원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생전에 7개의 이름을 사용했고 최소 2번 이상 정식으로 개명했다. 그가 이름을 바꾼 시기는 불미스러운 일과 연루됐을 때가 많았다. 육군 및 해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활동할 때는 최상훈, 부산에 잠시 살았을 때는 최봉수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던 최도원은 1954년 간통 혐의로 고소되자 경남 동래군의 금화사로 도피해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사용한 법명은 최퇴운(퇴운도사)이었다. 또 1965년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재직하며 유가증권 위조혐의가 발각돼 서울지검에서 조사를 시작하자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해남’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중간에 잠시 방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지만 그가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까지의 정식 이름은 법명인 최퇴운이었다. 최퇴운 법사는 1977년 예수교 장로회 조현민 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3월 9일 최태민으로 정식 개명했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모두 거쳐간 셈이다.
하지만 그를 목사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이 아무개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대학을 졸업하고 3년의 신학과정을 마쳐야 한다. 요즘에는 통상 4년제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대학원 과정까지 마치고 각 교단 총회서 실시하는 준목고시, 목사고시에 최종적으로 합격한 후에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기준으로 봤을 때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최태민 목사가 정식 목사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 목사 안수 기준이 지금과 달랐다고 해도 최 목사의 정통성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앞서의 책 <태자마마와 유신공주>에 따르면 사이비종교연구가 탁명환 소장이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해 준 조현민이라는 목사 역시 실체가 불분명하고 그는 목사안수 이후 최태민의 추종자가 됐다’라고 밝힌 대목을 봐도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계원 역시 “최태민이 목사라고 하길래 내가 어느 교파 목사인지 알아봤더니 최태민이라는 목사는 없었다. 교파도 불명이라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최태민 목사의 사이비 의혹에 관해 박근혜 후보는 지난 2002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식 기독교 목사였고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면 상대도 안 했을 것이다. 나도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고 했다”고 반박한 바 있다.
▲ 언론들이 다룬 최태민 목사의 각종 비리의혹과 구설. |
최 목사가 각종 이권개입 의혹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최 목사는 시기상 영세교 활동 이후 그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교단을 세웠다. 1975년 5월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세운 이후 박근혜 후보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기도 했는데 관련 일화가 <월간조선>에 자세히 실린 바 있다.
‘최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시킨 이후) 첫 사업으로 서울시내 각 구별로 구국기도를 개최했고, 5월 13일에는 임진강에서 기독교 목사와 신도, 일반 시민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장에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기도하자’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이 집회에 박근혜 영애가 참석했다. 최 목사는 이 자리에서 ‘큰 영애를 우리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모시자’는 즉석 제안을 했고, 영애는 최 목사의 제안을 수락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구국선교단은 1976년 12월 구국여성봉사단으로 간판을 바꾼다. 79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정보부 수사기록에 따르면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은 박근혜가 총재로 최태민이 명예총재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최태민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행사했으며,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신동아>, 2007년 6월호)”고 한다.
70년대 말 선교단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최 목사는 10·26 사태 이후 언론에서 종적을 감췄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이후 정국이 어수선했기 때문이지만 이 시기에 최 목사는 개인적인 비리에도 연루됐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최 목사는 1980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체포됐고 변호사법 위반, 사기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의 지시로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내져 실제 형을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최 목사는 1988년 박근혜 후보가 고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킬 때 고문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이 쓴 <한국 현대사>에서 “박근혜는 육영수의 사망 이후 최태민에게 의존했다. 박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이 모두 잘렸고 최태민이 추천한 사람이 박근혜의 비서가 됐다. 박근혜는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최태민이 뇌물을 받고 이권에 개입한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최 목사에 관한 의혹 대부분은 영세교 시절부터 대한구국선교단, 구국여성봉사단을 거쳐 새마음봉사단까지 이어진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80년대 새마음봉사단은 전국의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해 최대 300만 명의 단원을 확보하며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지낸 박 후보 역시 관련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셈이다.
친박 성향의 한 새누리당 보좌관은 “최태민 이야기는 대선을 앞두고 두고두고 나올 이야기라는 분위기가 있지만 5년 전 경선 때보다 더 나아갈 부분은 없을 듯하다”며 “개인적으로 박 후보도 억울한 측면이 많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의 스캔들(기록에 의하면 최태민 목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다섯 살 위)이라니 말이 되느냐”라고 밝혔다.
이른바 ‘최태민 미스터리’에 관해 그 자신과 측근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최 목사의 유일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던 1990년 4월호 <가정조선>에는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은 내가 기소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관련 의혹을 직접 부인했다. 또 말년에 자문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1991년 4월 <Inside The World>와의 인터뷰에서 “최 씨는 자신의 문제가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자신의 부덕함을 자탄하면서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조용히 서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관이었다”라고 밝혔다. 최 목사에 관한 실체와 각종 의혹들은 이제 그 가족들과 박근혜 후보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됐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재규가 바라본 최태민
‘박정희 저격에 태자마마 한몫’
최태민 목사의 각종 이권개입 의혹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이전에도 한 차례 공론화된 적이 있었다. 바로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하면서 쓴 항소이유서에는 최태민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가 거론됐다. 이 문서에서 김재규 부장은 최태민을 ‘태자마마’라 표현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까닭에는 최태민 목사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기도 했다.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에 여자들과의 추문도 알게 됐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기에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중략) 피고인이 ‘큰 영애(박근혜)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 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일도 있어…(이후 생략).”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는 지난 2007년 대선경선 당시 폭로된 79년 중앙정보부 기록과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 보고서에 기록된 최 목사의 부정은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2건, 융자관여 3건 등 도합 44건이었다. 또 여성 추문과 관련해서도 12건이 기록됐다.
2007년 ‘박근혜 X파일’을 폭로한 <신동아> 등에 따르면 “최태민은 정부, 공기업, 정치권, 군, 대기업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 로비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단순한 ‘목사’였을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수]
‘박정희 저격에 태자마마 한몫’
최태민 목사의 각종 이권개입 의혹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이전에도 한 차례 공론화된 적이 있었다. 바로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하면서 쓴 항소이유서에는 최태민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가 거론됐다. 이 문서에서 김재규 부장은 최태민을 ‘태자마마’라 표현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까닭에는 최태민 목사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기도 했다.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에 여자들과의 추문도 알게 됐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기에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중략) 피고인이 ‘큰 영애(박근혜)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 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일도 있어…(이후 생략).”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는 지난 2007년 대선경선 당시 폭로된 79년 중앙정보부 기록과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 보고서에 기록된 최 목사의 부정은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2건, 융자관여 3건 등 도합 44건이었다. 또 여성 추문과 관련해서도 12건이 기록됐다.
2007년 ‘박근혜 X파일’을 폭로한 <신동아> 등에 따르면 “최태민은 정부, 공기업, 정치권, 군, 대기업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 로비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단순한 ‘목사’였을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