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살아 있는게 최고의 반공교육’
▲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 |
‘김현희도 괴롭겠구나.’
나는 유가족이나 양심수협회 회원들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김현희가 측은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김현희와 2년을 보낸 것이다. 김현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고 숙소로 데리고 오는 일을 하는 나로서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검찰의 사실심리와 변호사의 반대심문, 그리고 최후 변론까지 끝나자 선고가 실시되었다.
“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과 참회하는 피고인의 눈물을 합께 보면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피고인은 북한 공산주의 집단의 대남공작원으로 대한항공858편을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고 이를 실천에 옮겨 115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자로서 이 같은 범행은 동기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도 지극히 잔인하고 악랄한 소행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돼 어떠한 정상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상학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김현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인가?’
나는 김현희가 통곡하는 것을 보고 착잡했다. 김현희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무엇이라고도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김현희는 며칠 동안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곧이어 항고를 하여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판 준비를 해야 했다.
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등법원에서도 사형이 선고되고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돼요?”
김현희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나는 김현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도 없었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의 사형판결이 난 후 한 달이 채 안된 4월 12일 김현희와 안가에서 오후를 보낼 무렵 담당 K 수사관이 환한 얼굴로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김현희!”
나와 김현희는 K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K 수사관은 대통령의 특별 사면장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나는 놀라서 김현희를 응시했다. 김현희도 놀란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사면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지만 사형 확정 이후 많은 TV나 신문 등 언론을 통해 김현희가 사면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에 그녀도 자신이 사면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면이 이토록 빨리 이루어진 것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복권이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김현희의 신병 관리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면복권하지 않으면 사형수 신분으로 계속 구금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으로 보호 관리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K 수사관은 엄숙한 표정으로 김현희에게 차렷 자세를 하게 하고 사면장을 읽어주었다. 사면장을 읽는 그의 목소리도 떨렸다.
“김현희, 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새로 태어나는 거야.”
K 수사관이 말하고 사면장을 건네주었다.
“축하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우리도 기뻐해 주었다. 재판이라는 절차를 거쳐 사형판결을 받은지라 그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죄를 용서받고 벌을 면제받는 것이니 그녀도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비록 그녀가 사형이라는 형벌은 면했다고 할지라도 평생 ‘살인범, 폭파범 김현희’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삶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가끔은 그때 죽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최근에도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산다는 얘기를 들으니 사형은 면했어도 그에 못지않은 형벌을 받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 <마유미>에서 KAL기가 폭파되는 장면. |
김현희의 사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115명이란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든 김현희를 사면한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북한은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KAL기 폭파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탄로 나면 목숨을 걸고 자결하여서라도 이 사건이 북한에서 지시한 것이라는 걸 비밀에 부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계속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언론매체와 해외 산하단체를 총동원하여 KAL기 폭파가 남한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김현희만이 사건의 진상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며 이러한 북한의 실체를 알리는데 김현희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 차원에서 오랫동안 실시해온 반공정책이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공작원이 북한의 실정을 폭로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반공 교육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50년대부터 전향한 간첩이나 공작원들을 처벌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강연 등을 하게 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공비 31명이 서울에 침투하여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했을 때 서울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행이 무장공비가 모두 사살되고 유일하게 김신조가 생포되었다.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북한 특수부대 출신의 김신조도 처벌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교육의 증인이 되었다. 공작원들이나 공비들을 처형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처형하지 않고 전향시켜 반공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현희도 그러한 측면에서 사면을 하게 된 것인데 그녀가 사형을 당했다면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형을 시켰다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김현희의 사면을 두고 한 일간신문의 논설에 실린 논평을 보면 김현희야말로 최상의 반공교육이라고 하였다.
“국민의 반공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텔레비전 앞에 나온 김현희의 얼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국민은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군더더기는 전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반공정책의 당사자들이 늘 하던 방식으로 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시민들은 머쓱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할 때도 됐다.
<중략> 여기서 우리는 다시없이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곧 우리가 자유롭게 잘 사는 것 이상으로 효과적인 반공의 무기는 없다는 교훈이다. 우리가 잘 사는 한, 우리는 조금도 북괴의 적화공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래서 김현희는 살려주는 게 좋겠다. 잘사는 나라의 자유로운 생활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우리들 자신이 잊지 않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더욱 아름답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북괴가 얼마나 잔인한 테러의 나라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산증인으로서 오래 살아줘야 한다. 지난 번 랭군 사건에 대해서도 북괴는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이번에도 김현희라는 인물이나 가족은 이북에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고 일본의 일부 저널리즘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한 허망한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김현희는 잘 살아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줘야 하는 것이다.”
KAL기 사건이 발생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그 무렵 안기부에서 퇴직해 있었고, 정권도 문민정부, 참여정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때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었나 하는 기억도 희미해질 무렵 김현희가 남한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소설이었다. 나는 소설이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로서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 어쩐지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 것이다.
소설이 출간되고 공영방송을 비롯한 각 방송사의 특집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소위 국가 차원의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라는 곳에서 재조사를 하는 등 그 의혹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국가정보원도 ‘국회의 재조사 요구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결국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도 재조사의 결과 ‘항간의 의혹은 많았지만 조사 결과 KAL기 폭파 사건은 북한공작원에 의한 폭파’라고 결론지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