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체험에서 나올 때 힘이 붙는다. 똑같은 봉사의 말도 이효리 씨나 차인표 씨가 전하면 귀 기울여 듣게 되지만 정치인이 전하면 귀를 막게 되는 것은 체험의 진정성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그 힘 있는 말도 내게 다가와 내 체험으로 용해되지 못하면 생명을 잃는다. 말도 죽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 봉사점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1시간 봉사 해놓고 8시간 봉사했다는 도장을 받는 일도 있고, 수험생 대신 봉사해주고 수험생이 봉사한 것처럼 서류를 만드는 일도 있단다. 단지 특정 대학의 입시를 겨냥해서 해외로 봉사 원정을 다녀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봉사가 화려한 스펙이 될 수 있을까 머리를 쓰고 돈을 쓰는 일은 수험생 학부모의 중요한 실력이 되었단다. 수험생과 선생님과 학부모만 탓할 것도 없다. 그런 상황이 오면 나라도 별 수 없을 것 같다. 뭐든 입시를 통과하면 메마른 악이 되는 저 현실은 입시가 지옥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얼렁뚱땅 대충대충 설렁설렁한 ‘무늬만 봉사’가 과연 봉사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디딤돌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원서의 스펙에서만 그친다면 입시지옥에서 우리가 가르친 것도 결국 화려한 가짜 인생이 되라는 것은 아닐는지.
요즘 들어 가끔씩 옛날에 읽은 고전을 꺼내 다시 읽는 습관이 생겼다. 그 시절 밑줄 그어놓은 문장 앞에선 웃음도 나고, 이제는 다른 곳에 밑줄을 긋는 나를 보며 이것이 세월의 힘이지 싶다. 지난 토요일엔 하루 종일 설렁설렁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보냈다.
이번에 나를 사로잡은 곳은 싯다르타가 고타마 부처님을 친견하고 떠나는 대목이었다. 함께 구도행을 하고 있었던 도반(道伴) 고빈다는 고타마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는데,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는 고타마 부처님을 떠나간다. 고타마의 가르침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았던 싯다르타가 스승 곁에 남아 스승의 가르침을 좀 더 배우지 않고 왜 스승의 곁을 떠났을까? 싯다르타가 말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다, 그래서 떠난다고. 그게 무슨 말일까? 싯다르타는 고타마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그저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처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체험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싯다르타답고, 고타마의 제자답지 않은가.
진정한 체험은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나’를 제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인지도. 그렇게 ‘나’의 촉수로 체험을 하며 사는 삶만이 진정 살아있는 삶이 아닐는지.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