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홈런’ 칠 때 한국 바다 건너 ‘불구경’
▲ 일본야구기구는 WBC조직위와 협상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봤지만 KBO는 이제서야 협상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사진은 2009년 3월 7일 열린 WBC 아시아예선 한일전. 로이터/뉴시스 |
# 일본 WBC 불참 주장 까닭
9월 4일 일본 오사카 고시엔구장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이날 고시엔구장 지하 인터뷰실에선 일본프로야구선수회 아라이 다카히로(한신) 회장의 기자회견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회견장에 들어온 아라이 회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선수회의 입장을 공식 발표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날 전까지 일본 선수회는 내년 3월에 열릴 제3회 WBC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일부 원로야구인과 구단 사장이 “올림픽에서 야구가 제외된 마당에 WBC까지 불참하면 큰일”이라며 설득 작업을 펼쳤지만, 선수회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선수회는 WBC 조직위의 ‘독식’에 불만이 많았다. 2회 대회가 끝났을 때부터 선수회 내부에서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미국이 쓸어간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난해 8월 일본 도쿄 아카사카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마쓰바라 도루 선수회 사무국장과 마쓰모토 다이스케 선수회 고문변호사는 “WBC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더는 WBC에 나가지 않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마쓰바라 국장은 “2회 대회까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WBC는 한국과 일본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대회”라며 “그러나 WBC 조직위는 철저히 한국과 일본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2회 대회 기준 WBC 수익금은 미국 66%, 일본 13%, 한국 9%로 분배됐다.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예선을 주도하고, 결승전에 맞붙으며 흥행을 이끌었지만, 정작 거액을 챙긴 쪽은 4강에서 탈락한 미국이었다. 하지만, 선수회는 “수익 분배 때문에 대회 불참을 선언한 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마쓰모토 고문변호사는 “정작 문제는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상품의 라이선싱 권리(상품화 권리)를 참가국이 아닌 WBC 조직위에서 가져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면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상품의 라이선싱 권리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나 FIFA(국제축구연맹)가 아닌 참가국 대표팀이 가진다”며 “하지만, WBC에서는 한국, 일본 대표팀의 자체 스폰서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사실이었다. 메이저리그(MLB) 사무국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가 합작해 만든 WBC는 참가국의 스폰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2009년 2회 대회 때 한국 대표팀도 미국 스포츠용품사 ‘나이키’로부터 유니폼 지원을 받았지만, 스폰서료는 챙기지 못했다. 일본은 더했다. 수많은 기업이 일본 대표팀의 스폰서로 참여했다. 그러나 9억 엔(약 130억 원)에 달하는 일본 기업 스폰서료 전액이 WBC 조직위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쓰바라 국장은 “WBC에서 발생하는 수십억 엔의 스폰서료를 일본 야구발전기금으로 쓰는 것이 온당하다”며 “WBC 조직위로부터 정당한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를 받으려고 싸우는 것도 이 돈이 다음 세대를 위한 야구 투자의 일환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2009년 3월 9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예선에서 한국이 일본을 꺾고 1위를 차지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선수회의 WBC 불참 의지는 올해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선수회의 강경노선에도 WBC 조직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일본을 빼고 대회를 치를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양측의 팽팽한 긴장이 진정국면에 들어간 건 지난 8월이었다.
일본야구기구(NPB)는 겉으론 “WBC에 참가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속으론 선수회의 의견에 동조했다. NPB는 선수회에 “WBC 조직위와 만나 구체적인 협상을 벌일 테니 대회 불참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한 뒤 니혼햄 파이터스 시마다 도시마사 대표를 교섭 창구로 정해 8월 중순부터 WBC 조직위와 협상을 벌였다. 시마다 대표는 미국 뉴욕에서 WBC 조직위와 담판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까지 WBC 조직위의 입장은 강경했다. “일본 대표팀에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시마다 대표가 “우리에게도 명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선수회를 설득하지 못하고, 일본은 대회에 불참하게 될 것”이라며 WBC 조직위를 압박했다. 한편으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것이 바로 WBC 명칭과 로고를 사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본 대표팀의 독자적인 스폰서 권리를 인정하는 이른바 ‘제한적 스폰서권’이었다.
WBC 조직위는 자체 토론 끝에 ‘기업들이 WBC 명칭과 로고를 사용하지 않는 마당에 굳이 일본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며 시마다 대표의 아이디어를 수용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시마다 대표는 선수회에 WBC 조직위와의 협상 결과를 전했다. 그리고 “NPB와 12개 구단이 힘을 합쳐 최대한의 스폰서 수익을 올리겠다”며 일본 대표팀을 ‘사무라이 재팬’으로 브랜드화 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NPB는 9월 3일 일본 야구 대표팀을 사업화하는 ‘사무라이 재팬’ 사업국을 신설했다. NPB는 ‘사무라이 재팬’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개발·판매하고, 연간 2번의 국제 경기를 개최해 막대한 입장수익과 TV 중계권료를 거둬들인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 돈은 일본 야구저변 확대에 쓸 예정이다.
마쓰바라 국장은 “WBC 조직위로부터 일본 대표팀의 권리를 인정받고, NPB가 ‘사무라이 재팬’ 사업국까지 신설하면서 선수회가 극적으로 WBC 참가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일본의 WBC 참가 결정으로 ‘사무라이 재팬’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며 “‘사무라이 재팬’을 후원하려는 일본 기업들이 쇄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NPB와 선수회는 ‘사무라이 재팬’이 4년에 40억 엔(약 578억 원)이 넘는 수익을 창출할 것으로 전망한다.
결과적으로 선수회의 줄타기 싸움과 NPB의 노련한 협상이 일본야구계에 578억 원의 수익을 안긴 셈이다.
▲ 선수협은 일본 선수회에 ‘WBC조직위와 협상 공동보조 맞추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전임 집행부로부터 WBC 관련 자료를 인수받지 못해 허공만 바라본 처지가 됐다. 연합뉴스 |
일본이 선수회의 투쟁과 WBC 조직위와의 적극적 협상을 통해 얻을 걸 얻었다면 한국은 ‘만만디’다.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다. 일본의 WBC 참가가 알려지고서 한국야구위원회(KBO) 고위관계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는 “조만간 WBC 조직위 관계자가 방한하기로 했다”며 “‘우리도 일본처럼 자국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언뜻 그의 말만 듣자면 WBC 조직위와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반대다. 일단 협상 타이밍이 지났다. WBC 조직위는 9월 7일 대회 세부일정을 발표하며 참가국을 최종 확정 발표했다. 28개 참가국엔 한국도 포함됐다. 한국의 대회 참여가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일본은 WBC 조직위가 참가국을 최종 발표하기 전까지 대회 불참을 고수하며 협상을 진행했다. WBC 조직위는 일본과의 협상이 난항을 겪자 계속 발표를 미뤘고, 일본이 대회 참가로 선회하자 그제야 세부일정과 참가국을 최종 발표했다.
한 야구해설가는 “협상이란 원래 일본처럼 ‘우리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면 대회에 불참하겠다’고 벼랑 끝 전술을 펼쳤어야 한다. 하지만, KBO는 이미 참가국이 발표된 상태에서 협상에 임하겠다는 것”이라며 “WBC 조직위가 잡은 물고기인 KBO에 떡밥을 물려줄 리 없다”고 단언했다. 덧붙여 “만약 한국이 WBC 조직위와 협상이 틀어져 대회 불참을 선언하면 모든 책임은 참가를 약속했던 한국이 지게 된다”며 “도대체 ‘협상’의 ‘협’자를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KBO를 비판했다.
WBC 조직위와 협상하기로 했다는 KBO의 주장도 사실관계를 따질 필요가 있다. WBC 조직위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KBO와 한국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에 관해 대화를 나눈 바 없다”며 “우리의 방한 목적은 대회 일정과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지 기타 권리를 둘러싼 협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KBO의 솔직한 속내는 “일본처럼 선수협이 나서서 협상을 주도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긴 선수협도 마찬가지다. 선수협은 지난 5월 일본 선수회로부터 ‘WBC 조직위와의 협상에서 공동보조를 맞추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그간 선수협이 한 일은 없다. 아니 일을 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이유는 간명했다.
현 선수협 집행부는 전임 집행부로부터 WBC에 관한 제반 업무를 전혀 인수·인계받지 못했다. WBC 조직위의 연락처는 고사하고, WBC 조직위의 중심축인 미 메이저리그 선수노조 관계자의 이메일도 받지 못했다. 여기다 KBO 역시 선수협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선수협은 허공만 바라보는 처지가 됐다.
뒤늦게 KBO와 선수협은 “힘을 합쳐 일본처럼 얻을 건 얻자”는 방침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다. 대표팀의 스폰서 권리와 라이선싱 권리의 구체적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KBO 고위관계자는 “일본은 선진국이라, 많은 기업이 대표팀 스폰서로 나서겠지만,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선뜻 스폰서를 하겠다는 기업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WBC와의 협상을 통해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NPB가 자국 대표팀을 ‘사무라이 재팬’이란 이름으로 상품화하려고 노력한다면 KBO는 아무 노력도 없이 경기 탓만 하는 셈이다. 경기만 따진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사정이 좋지 않다. 좋지 않은 경기에도 수익을 창출하려는 노력하는 것. 그것이 협회가 할 일이라는 걸 KBO만 모르는 꼴이다.
# 야구흥행 기폭제 스스로 차버릴라
일본은 WBC 참가를 발표하며 감독직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일본 언론은 날마다 WBC 감독 후보군을 소개하며 누가 감독이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회가 7개월이나 남고, 아직 정규시즌임을 고려하면 일본의 감독 논란은 너무 일러 보인다. 그러나 일본야구계는 “감독 선임 논란의 이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귀띔한다.
일본야구 칼럼니스트 하세가와 쇼이치 씨는 “누가 감독이 될지 설왕설래하는 것 자체가 WBC 홍보”라며 “지난해부터 야구인기가 주춤하며 일본야구계 전체가 WBC를 야구흥행의 디딤돌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설명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2006, 2009년 일본야구계는 WBC 우승으로 침체된 자국야구를 되살린 기억이 있다. 올 시즌 일본 프로야구는 다시 침체를 맞고 있다. 센트럴리그는 1%, 퍼시픽리그는 3.3%나 관중이 감소했다. 다시 말해 일본은 WBC를 야구중흥의 계기로 삼고, 작은 이슈만 생겨도 이를 확대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자국리그가 사상 최고의 흥행실적을 거두고 있어선지 WBC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WBC 기사는 고사하고, 5일 KBO가 WBC 예비명단 50명을 작성했다는 소식도 공개되지 않았다.
감독 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은 전·현직 감독들을 차례로 비교하며 누가 최상의 감독인지 격론을 벌이지만, 한국은 감독의 기본적인 조건조차 논의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용철 KBS 해설위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 프로야구는 10년 동안 암흑기를 달려왔다. 그 암흑기에서 프로야구를 구해준 게 2006년 제1회 WBC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 국제대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프로야구 인기가 회복됐다고 모두 국내리그만 관심 있다. 장사가 잘 될 때 더 잘되게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좋은 기회가 WBC임에도 모두가 ‘나 몰라라’하고 있다. 일본처럼 협상을 통해 큰 수익은 창출하지 못할망정 눈앞에 찾아온 좋은 야구흥행의 기폭제마저 스스로 차버린다면 차후 크게 후회할 수 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