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두번의 추락 뒤에 이런 해피엔딩이…”
▲ 한판승의 사나이 최민호는 유도대표팀 코치로 발탁된 데 대해 막연히 지도자 생활을 꿈꾸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주어질 줄 몰랐다는 소회를 밝혔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이런 걸 두고 ‘인생역전’이라고 해야 하나보다. 런던올림픽 본선행이 좌절되면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 대표팀 코치로 선임되며 다시 선수촌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 (인터뷰)약속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했다. 설령 인터뷰 장소에 나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원망만 가득했기 때문에 기사화할 수 없는 얘기만 떠들어댔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준호가 최종 확정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조준호와는 같은 마사회 소속이고 평소 절친했던 선후배 사이였는데….
▲베이징올림픽 이후 한동안 운동을 쉬면서 은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렇게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훈련을 시작했고, 금메달 획득보다 더 어렵다는 본선행 티켓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런던올림픽을 마지막 은퇴 무대로 여기고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한 단계씩 차근차근 올라갔다가 마지막에 조준호를 만났고, 조준호를 제압하려면 임팩트 있는 경기를 펼쳐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어깨 메치기 한판승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그런데 결국엔 조준호가 대표팀에 최종 선발됐다. 준호와는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런 사적인 관계를 떠나 강화위원회의 발표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다면(랭킹이 높은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해야 유리한 시드 배정을 받는다는 강화위원회의 주장) 뭐 하러 힘들게 선발전을 치르고 매 경기를 마지막이라는 간절함을 갖고 시합에 임했겠나. 허탈하고 헛헛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서른두 살의 최민호는 지금은 대표팀 코치 생활에 전념한 뒤 여유가 있을 때 남들처럼 연애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개인적으로는 전혀 껄끄러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준호랑은 대화가 가능했다. 막상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준호가 갖는 부담이 극심했다. 그래서 내가 그 부담까지 안고 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걸 이겨내면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준호가 4강에서 심판 판정 번복으로 지고 3, 4위전으로 내려갔을 때는 정말 속상하더라. 누구보다 준호가 금메달을 따기 바랐다.
―결국엔 조준호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동메달을 걸고 온 조준호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4년 전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메달도 금메달 딴 것처럼 국민들이 좋아해주고 대우해주고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도 느꼈다. 아테네올림픽에서 내가 동메달을 땄을 때는 아예 관심 밖이었는데 말이다. 준호는 올림픽 이후를 재미있게 즐기더라. 난 4년 전에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집중되고 알아보는 상황들이 부담스러워서 도망 다니고 숨느라 바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랬나 싶다.
▲ 아테네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건 최민호. |
▲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최민호. |
▲올림픽 끝나고 계속 놀았다.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도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2008년 11월 즈음에 코칭스태프에 의해 강제로 선수촌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때는 도저히 다시 운동할 자신도 욕심도 생기지 않았다. 하루 하루 시간을 보내는 게 죽을 맛이었다. 올림픽 이후 체중이 불어나서 체중 감량을 하며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기가 버거웠다. 한 마디로 정신상태가 해이해졌던 것이다. 심지어 대학생한테도 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가 대학생한테 졌다는 소문이 나면서 유도계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결국 2010년 3월부터 7개월가량 쉬었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포기 상태나 다름없었다.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은퇴 후 뭘 해먹고 살아야하는지를 걱정했다. 그러다 전국체전을 2주가량 남겨놓고 훈련을 재개했다. 7개월을 쉬다가 겨우 2주만 훈련했을 뿐인데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게 되더라. 처음엔 운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력으로 얻은 금메달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런던올림픽에 출전해야겠다는 마음은 언제부터 들었나.
▲그런 상태에서 외국 대회에 나가 포인트를 쌓기 시작하면서 슬며시 3회 연속 올림픽 출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결정적인 게 2012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표 선발 포인트를 쌓았고 세계 랭킹 40위 밖에 머물다 공동 19위에 오르며 선발전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부분이다. 그런데 선발전 첫 경기에서 지도패를 당했다. 순간 좌절감이 극심했지만 포기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고 이후 네 경기를 모두 한판으로 이겼다. 마침내 패자부활전을 거쳐 결승전에 올랐는데 거기서 조준호를 만나 한판승으로 제친 것이다. 올림픽에 가진 못했지만, 선발전에 도전한 과정 자체가 나로선 드라마나 다름없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누구보다 체중조절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체중을 빼다가 호흡 곤란을 겪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때 (이)원희가 옆에 없었더라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원희가 날 발견하고 등을 치면서 물을 먹여주는 바람에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그때 정말 내 목숨이 끝나는 줄 알았다.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때는 선수촌 숙소가 8층이었는데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체중 빼는 게 훈련보다 더 힘들었다. 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대회 때마다 8~9kg을 빼는 일들을 반복했다. ‘죽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체중조절과 훈련을 하지 않아도 돼 기쁘겠다. 선수가 아닌 코치가 됐으니까.
▲정말 행복하다(웃음). 런던올림픽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훈련과는 담을 쌓았고 자연스레 은퇴 수순을 밟았다. 그러다 협회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내가 대표팀 코치로 발탁됐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인생이 살 만한 이유는 이런 ‘반전’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조인철 감독님과 송대남 코치 등 새로 구성된 코칭스태프가 모여 회의를 했다. 선수들 훈련 스케줄을 짰는데 선수 때는 그 훈련 스케줄을 보며 ‘우린 정말 죽었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와, 얘네들 진짜 죽겠구나’란 생각으로 바뀌더라. 나한테 이런 날이 찾아오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막연히 지도자 생활을 꿈꾸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주어질 줄 몰랐다. (조)준호도 대표팀에서 다시 만난다. 올림픽 이후라 한창 훈련하기 싫을 텐데 어쩔 수 없다(웃음).
서른두 살의 최민호에게 결혼 얘기를 꺼냈다. 그는 아직 때가 안 됐다고 말한다. 베이징올림픽 후 잠시 여자를 사귄 적이 있지만 잘 되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대표팀 코치 생활에 전념하고 여유가 있을 때 연애도, 결혼도 하고 싶다는 얘기를 덧붙인다. 그래서 “돈은 좀 모았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최민호는 “제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돈이에요. 사람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니까 엄청난 돈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밖에서 보는 것처럼 많은 돈을 모으진 못했어요. 그래도 옛날보단 잘 살고 있고, 앞으로 더 모으면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선수가 아닌 ‘최 코치’로 불리며 지도자 수업을 쌓아가는 최민호는 올림픽을 준비한 자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는 얘길 전한다. 운동이, 훈련이 진저리나게 싫었고 도복은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처박아뒀지만 유도를 통해 그가 배운 건 인내와 극기, 그리고 인성이었다. 그래서 그가 가는 지도자의 길에 기대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