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졌다’…수사관들 발칵
▲ 김현희가 군부대를 방문한 모습. 맨오른쪽이 최창아 전 수사관이다. 사진제공=최창아 |
때때로 우리는 색다른 것을 먹기 위해 스파게티나 칼국수 등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는 각자 반찬 한 가지씩을 하자고 하자 김현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북한에서 먹던 무나물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무를 채 썰어 프라이팬에 볶았다. 잠시 후 서로 만든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했는데 김현희가 만든 무나물은 맛이 없는지 다들 손이 안 갔다.
“왜 맛이 안나나?”
김현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몇 젓가락 먹은 뒤 먹지 않았다. 그 후로는 직접 반찬은 안하겠다고 하면서 옆에서 도와주기만 했다.
김현희와 안가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난 일들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김현희의 성품을 파악하고 그녀가 어떻게 안가 생활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일에 음식을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다고 하면 김현희는 얼굴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언니야 양념을 많이 넣으니까 맛이 있겠지요.”
김현희는 톡 쏘아붙이듯이 말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현희는 북한에서 중류 가정에서 생활하였고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했다. 공작원으로 선발되고서도 북한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지냈고, 공작 활동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북한에서는 일반인이 꿈도 못 꾸는 외국 여행도 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머리나 외모도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남한에 와서도 비록 폭파범이었다고는 하나 언론에서도 그녀의 미모에 대해 늘 보도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미인이다”라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현희와 같이 있었던 여수사관들도 다들 어려운 과정의 공채시험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들이었고 또 안기부에 여수사관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김현희와 같이 강연을 가든가, 누구를 방문하는 자리에서는 처음엔 김현희에 대해 관심을 갖다가 차츰 여수사관들에게 관심을 돌리기도 했다.
“안기부에 여수사관이 있었습니까?”
“여수사관도 사격 훈련이나 무술 훈련을 받습니까?”
사람들은 안기부 여수사관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묻고는 했다.
“미인이시네요. 안기부 여수사관이라 다르네요.”
N 수사관이 김현희를 동행할 때면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었다. N 수사관은 우리가 보기에도 미인이었다.
“성격 좋고 우아하게 생기셨네요.”
J 수사관이 동행하면 의례적일지는 몰라도 다들 한마디씩 칭찬을 하고는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김현희의 기분이 저조해지고 말았다. 어느 날 그녀가 외출하고 돌아와 말도 안하고 우울해 있어서 같이 나갔던 여수사관에게 물었다.
“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실은 같이 갔던 교회에서 나보고 미인이라고 칭찬을 했어. 그런데 저렇게 기분 나빠하네.”
N 수사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인격이 성숙한 성인이라면 비록 기분이 나쁘더라도 겉으로 표시를 안 낼 텐데 그녀는 그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여학생 같았다. 그것은 북한에 의해 어린 나이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적인 인간으로 양성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교양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안가 생활은 김현희를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한국 생활에 적응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수사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현희는 한국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추석과 설날에 고향에 가거나 차례를 지낸다. 북한에서는 고향에 가는 일은 거의 없고 김일성이나 김정일로부터 선물을 배급받는다. 그것이 고기일 수도 있고 쌀과 같은 식량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직장에서 명절 보너스를 받기 때문에 고향에 갈 때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간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김현희는 수사관들과 함께 안가 생활을 하면서 수사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느 날 자기와 함께 생활하던 수사관들이나 경호원, 식사 담당 아주머니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 명절 때였는지 크리스마스 때인지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나도 도와 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요.”
당시 김현희는 강연하고 난 뒤 사례금을 받는다거나 사회 지도층 인사로부터 격려금을 받았고 각종 선물도 받아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가 되면 자신이 받았던 선물들 중에 필요 없는 것들을 선물하려고 했다.
“선물은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 남도 좋아하는 거야. 필요 없는 물건들을 주는 게 아니야.”
수사관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김현희는 그때서야 선물의 참뜻을 이해하고 좋은 물건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 1993년 4월 17일 최 전 수사관 생일을 맞아 김현희가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낸 카드. 사진제공=최창아 |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많지는 않지만 돈을 내 놓으면서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하여 남자들에게는 양말, 여자들에게는 스타킹이나 커피 잔 같은 것을 선물하기도 했고 생일에는 카드도 보내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풍속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기쁘게 생각했다.
김현희는 머리가 영리하였고 공작원으로 일본인화, 중국인화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적응력도 뛰어났다.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여 바꿨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대부분의 여자들이 날씬하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니까 자신도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날씬하게 변했다. 공작원 시절 체력 단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처음 왔을 땐 허벅지와 종아리가 탄탄했다. 그런데 한국 여자들이 다리가 날씬한 것을 선호하는 것을 알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두 다리를 들고 돌리기를 하는 등 노력을 많이 하여 나중엔 다리도 꽤 날씬해 졌다. 안가에서 김현희는 여수사관들과 한 방에서 침대를 같이 놓고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그녀가 ‘부시럭부시럭’ 이불에서 다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 잠이 깨고는 했다.
‘아이고, 잠 좀 자자!’
그럴 때마다 우리는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했다.
보통 수사관들은 24시간씩 남녀 4명씩 교대 근무를 했는데 김현희는 그렇게 하루는 집으로 퇴근하고 하루는 안가에서 근무하는 수사관들을 부러워했다. 공작원이 되어 보호와 감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김현희에게는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관들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지만 우리는 하루 이틀씩 24시간 근무를 하다 보니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약속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한 수사관이 약속은 잡혀 있고 교대해 주기로 한 다른 수사관이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교대할 수사관이 오자 신경질을 좀 냈다.
“아니 여기처럼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 신경질을 내요? 참 한심하네요.”
김현희가 옆에 있다가 끼어들었다.
“아니 이제는 네가 수사관들 머리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려고 하니? 너 주제넘은 거 아냐?”
순간 나는 두 수사관들보다 끼어든 김현희에게 호통을 쳤다. 김현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때야 내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24시간 누군가가 옆에 붙어있고 마음대로 집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니 답답한 심정에서 그래도 바깥에 나가 개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사관들이 부러운 심정에서 그랬을 것이다. 김현희는 지방 강연이나 간증이 있는 날이면 그래도 바깥 구경을 해서 괜찮았지만 며칠씩 안가에 있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하루는 안가에서 김현희가 보이지 않았다. 안가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그녀가 보이지 않아 발칵 뒤집혔다. 우리는 어떻게 그녀를 찾을까, 혹시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김현희가 배신을 하고 탈출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지는 않았으나 아무말없이 나간 것이 괘씸했다. 김현희 역시 우리처럼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사람들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공작원교육을 받을 때도 소위 자유주의라 하여 가끔 몰래 외출했다 돌아오곤 했다고 하더니 여기서도 역시 그 기질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김현희는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왔다.
“어딜 갔다가 온 거야?”
수사관들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동네 슈퍼에요. 동네 슈퍼는 자동차로 자주 다녀 거리를 익혔기 때문에 혼자 한번 나가보고 싶었어요.”
김현희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말이라도 하고 나가야지 걱정을 안 하잖아?”
나는 수사관이나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단단히 감시할 것을 주문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김현희는 동네 슈퍼에 들어갔으나 주인이 알아보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되돌아 나왔다고 했다.
“혹시 김현희 씨 아니에요?”
주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 김현희는 대답도 못하고 얼버무렸다고 했다. 김현희는 그 이후에 안가에서 절대로 혼자 나가지 않았다.
안가에서 강연이나 간증을 다니다가 앞으로는 사회적으로도 적응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안기부 내 작은 사무실에 나가도록 했다. 사무실에서는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한 원고를 쓰기도 하고, 일본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틈날 때면 책을 읽기도 했다. 안기부의 직원이 아니었으나 그녀에게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