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얼굴 보자” 강연 때마다 북적
▲ 김현희가 1996년 6월 11일 한국체대 강당에서 대학생 초청 통일안보 강연을 했다. 연합뉴스 |
김현희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현희 양은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한 적이 있나요?”
목사님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지요.”
김현희는 일반화시켜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은 “네” 혹은 “아니오”로 대답하는데 김현희는 달랐다. 그래도 목사님은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놓고 정성껏 성경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어떤 맛있는 것을 주시려나?’
수사관들은 은근히 목사님이 주시는 음식을 기다리고는 했다. 목사님이 간혹 외국에라도 다녀올 때면 잊지 않고 김현희에게 초콜릿, 화장품 등 선물을 사다주어 그녀도 목사님을 믿고 의지했다.
김현희가 성경공부를 할 때는 남녀 수사관이 1명씩 같이 참여하였는데 지금의 남편인 H 수사관이 같이 갈 때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매우 지루해하여 가끔 졸기도 했다.
“H 선생은 졸 거면 들어오지 마세요. 공부에 방해돼요.”
김현희는 H 수사관에게 노골적으로 핀잔을 주곤 했다.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안이숙 여사도 만났다. 안 여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을 당했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저서도 쓰고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찬송가의 가사도 쓴 분이다.
성경 공부를 거듭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서 세례(침례)를 받아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고 목사님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텐데 KAL기를 폭파한 북한 공작원이 오늘의 기독교인이 된 경위를 구구절절 말하면서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큰 호응을 보였다.
이렇게 시작하게 된 김현희의 신앙간증은 아는 사람을 통해 한두 교회로 늘어났고 김현희가 간증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간증 한번 와달라는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김현희에게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회도 되고 또 순수한 신앙 간증과 더불어 북한의 실상을 알릴 홍보의 기회도 될 수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한 간증을 원하는 교회는 다 다니도록 노력했다.
김현희가 교회로 간증을 다닌다는 소문이 나자 어떤 때는 유가족 모임에서 사람들이 와서 교회 뒤편에 앉아 있다가 간증이 끝나자 김현희가 있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김현희와 만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현희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고 우리 수사관들도 바짝 긴장했다.
“여기는 교회이고 간증하는 자리이니 이렇게 와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우리 수사관들은 유가족들을 정중하게 설득했다. 그들도 교회라는 공간인 탓에 별 소란 없이 그냥 돌아섰다.
김현희는 찬송가 중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좋아했다. 하기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구절이 죽었다 살아난 김현희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안기부에서 7년 정도 근무했다. 처음 6개월은 훈련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그 뒤 6개월은 김만철 씨 귀순 사건에 매달려 보내다가 김현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김현희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6년을 보냈다.
김현희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것 외에도 국가 기관이나 기업체 군부대 등으로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반공 강연이었다. 그 어느 곳도 우리가 요구해서 간 적은 없었고 늘 강연 요청이 쇄도하여 밀려 있을 정도였다.
남파 간첩이나 귀순자들의 반공 강연은 그 전에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김현희는 이제 폭파범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강연에는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늘 사람들로 넘쳐났고 호응도 좋았다. 정계 재계의 높으신 분들은 김현희를 공개, 비공개로 만나 얘기를 나누고 격려금도 주었다.
김현희에게는 남한에서 귀순자에게 주는 정착금도 없었을뿐더러 안기부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도 처음에 옷가지와 생필품 몇 가지를 사주었을 뿐 그 뒤부터는 식대만 지급되었기 때문에 간증이나 강연을 다니며 받는 사례금으로 자기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여기저기서 선물도 많이 받고 해서 자신의 돈으로 물건을 살 일은 별로 없었다.
간증 강연을 위해 지방을 다닌 곳 중 김현희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제주도였다. 북한에서는 보지 못한 이국적인 분위기에 바다 구경도 할 수 있어서도 그랬지만 며칠씩 안가가 아닌 외부에서 잘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오랜만에 자유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은 보안문제 때문에 호텔이 아닌 안기부 관사에서 잤다.
▲ 제주도에 안보 강연을 하러 간 김현희가 잠시 바닷가에 들렀다. 오른쪽은 최창아 씨. 사진제공=최창아 씨 |
인천의 한 기업체에 강의를 갔을 때였다. 사람은 좋지만 가끔 짓궂은 농담도 잘하는 운전기사가 인천으로 가는 차안에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한번쯤은 불러봄직한 노래지만 정확하게 가사를 읊조리지 못한 채 흥얼거렸다.
“그게 무슨 노래입니까?”
김현희가 의아해 하여 물었다.
“응, 인천에 성냥공장이 많아서 생긴 노래야.”
기사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노래의 내용을 알고 있는 우리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강연이 끝나고 기업체 간부들과 차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인천에는 성냥공장이 많다면서요?”
김현희가 차를 마시다가 말고 불쑥 물었다. 그들은 갑자기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했으며 우리는 또다시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야기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김현희는 외신 언론들과도 많은 인터뷰를 했다. 어느 일본 기자는 김현희에게 평양에서 살던 집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었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김현희는 자신이 살던 집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서 이야기했다.
“사실은 내가 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현희 씨가 살던 집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집과 일치합니다.”
김현희는 일본 기자가 자기 집에 갔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우리도 놀라서 일본 기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정말이에요?”
“사실입니다.”
김현희는 자신의 가족이 아직도 살고 있지는 않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살고 있나 해서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그 기자는 김현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 보았다고 말했다. 김현희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실망하고 슬픈 얼굴을 했다.
김현희는 해외의 수사기관들과도 많은 면담을 했다. 어느 날 미국 CIA 한국 담당관과 면담이 있다고 하자 김현희는 다른 기관과 면담할 때보다 많이 긴장했다. 그녀에게 어려서부터 뼈에 사무치게 들어온 미 제국주의에 대한 미움과 공포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CIA와의 면담에서 그들은 여러 장의 북한 인물 사진을 제시하며 김현희에게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중에서 김현희는 김정일 친필지령이라며 KAL기를 폭파할 임무를 부여해 주었던 이 부부장(이용혁)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체류당시 관리해 주던 한 지도원(한송삼)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본명은 몰랐지만 이 부부장, 한 지도원을 정확히 찾아내었고 더욱이 부다페스트에 체류할 당시 묵었던 한송삼 지도원의 숙소에 대해서는 주변의 약도와 집의 구조 등을 정확히 그려내 CIA 측을 매우 만족시켰다.
또 다른 날은 마카오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정보원에 대한 자료를 가져와 김현희에게 확인을 요구하였다. 그때 수사관들이 김현희와 김숙희가 마카오에서 현지 실습을 할 때 그들을 관리하였던 북한 지도원이 ○○○ 아니냐고 물으면서 사진을 내놓자 김현희는 매우 놀라면서 이런 것까지 이미 서방세계에 다 알려졌는데 북한은 무슨 공작을 한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날 한 여성 잡지사로부터 김현희의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런데 당시 인기가 높았던 여자 탤런트와의 대담 형식의 인터뷰 요청이었다. 그 탤런트는 단아하고 조용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좋다고 승낙하고 시내 한 호텔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