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면 된다? 누가 그래! ‘큰손’들이 흥행 좌우
▲ <광해, 왕이 된 남자> 제작발표회.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영화계에서는 <도둑들>이 1000만 관객을 기록하고 불과 세 달여 만에 <광해>까지 1000만 돌파가 가시화되자 일단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흥행 대작이 탄생한 뒤 그에 따르는 후광효과도 기대하는 눈치, 영화 투자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이로 인한 제작 환경이 좀 더 여유로워질 것이라는 전망 등이 나오고 있다.
올해 유난히 흥행작이 많은 이유는 최근 들어 멀티플렉스 수가 늘어나면서 스크린도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극장이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의 수가 당연히 늘었고 그에 부응하는 다양한 영화적 기획도 나왔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객의 수를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처음으로 800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극장을 찾은 총 관객 수는 8279만여 명. 지난해 같은 기간 6842만 명과 비교해 1400만 명이나 증가했다. 한국영화 관객도 급증했다. 상반기 한국영화 관객 수는 4148만 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36만 명이 늘어났다.
하반기에는 관객 수가 더 증가할 것으로 영화진흥위원회는 보고 있다. <도둑들>과 <광해>가 하반기에 개봉해 나란히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2012년은 역대 한국영화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울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화계에서는 “요즘은 한국영화를 극장에 걸면 무조건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일단 “괜찮다”는 입소문만 나면 ‘평균’ 200만~300만 관객은 거뜬히 넘어서는 최근의 극장가 분위기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시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요즘 한국영화는 곧 흥행한다’는 기대는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 극장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모든 영화에 골고루 상영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 전국 대부분의 극장이 복합상영관인 멀티플렉스로 바뀐 상황에서 이를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의 입김이 영화 흥행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게 현실이다. 대형 배급사가 투자한 특정 영화가 이 회사의 또 다른 계열인 멀티플렉스 스크린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이제 영화계에서 흔한 일이 됐다. 독점에 가까운 이 같은 ‘힘의 논리’ 탓에 영화 흥행 기록이 좌우되는 일이 점차 늘고 있다.
위기의식을 가장 먼저 느끼는 건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제작진이다. 때문에 <피에타>를 연출한 김기덕 감독은 흥행 신기록을 위해 자사 영화를 챙기는 대형 배급사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도둑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일침을 놓기도 했다.
▲ <도둑들> 1000만 카운트다운 특별 이벤트.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광해>는 국내 빅3 배급사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CJ엔터테인먼트가 기획·개발하고 배급한 작품이다. 영화 제작사가 기획해온 영화를 심사해 투자와 배급을 결정했던 기존 방식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화의 시작부터 함께 참여했다는 의미. CJ엔터테인먼트가 얼마나 <광해>에 공을 쏟고 있는지는 엔딩 크레딧에서도 드러난다. 매년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해 개봉하면서도 좀처럼 이름을 넣지 않았던 CJ엔터테인먼트의 최고위층 임원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올라 있는 것. 이를 본 영화 관계자들은 흥행에 대한 자신감이자 확실히 이 작품을 지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광해>는 개봉 시기에 대한 배급사 전략의 ‘냉정한’ 사례로 꼽힌다. 당초 추석 연휴 직전 개봉하려고 했지만 예고 없이 일주일 앞당겼다. 개봉 날짜를 일찌감치 확정한 대작 영화가 갑자기 일정을 바꾸자, 태풍을 피해 개봉을 미루거나 앞당겼던 작은 영화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광해>는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는 상황에서 빠르게 객석을 선점했다. 개봉 2주차에 접어들어서는 스크린을 최대 1000개까지 차지했다. CJ엔터테인먼트 계열 회사인 멀티플렉스 CJ CGV의 전폭적인 지원도 받았다.
<도둑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이 영화를 투자·배급한 쇼박스 미디어플렉스는 4년 전 분리됐지만 여전히 돈독한 신뢰관계를 유지한 극장 체인 메가박스의 후방 지원을 받았다. 개봉 시점이 한참 지나 CGV와 롯데시네마에서 <도둑들>이 대부분 내려갔을 시점에도 메가박스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갔다.
쇼박스는 심지어 연중 극장가 최대 대목인 추석 연휴에도 새 영화를 공개하는 대신 개봉한 지 두 달이 지난 <도둑들> 상영을 고집했다. 결국 이 같은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도둑들>은 기존 1위였던 <괴물>을 제치고 한국영화 흥행 선두에 올랐다.
이 같은 전략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1000만 영화는 더 자주 나올 수 있다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CJ엔터테인먼트나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 힘 있는 투자·배급사가 작정하고 특정 영화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면 관객이 영화를 스스로 선택할 기회는 자연히 줄어든다.
한국영화 세 편을 제작한 영화사의 대표는 “추석 연휴 동안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볼 영화는 사실상 <광해>밖에 없었다”며 “극장 대부분의 스크린을 하나의 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관객이 다양한 영화를 선택해서 볼 기회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큰 영화의 흥행 신기록이 계속 나올수록 다양성을 지닌 작은 영화의 처지는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려는 계속된다. 올해 1000만 관객을 넘은 <도둑들>과 <광해>가 기발한 이야기와 새로운 시도를 내세운 영화가 아니라 익숙한 소재를 차용했다. <도둑들>은 할리우드 인기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한국판으로 불렸다. 주인공들의 구성부터 카지노를 습격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겹친다. <광해> 역시 개봉 이후 미국 영화 <데이브>와 설정이 비슷해 네티즌들에게 논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앞서 1000만 관객을 넘은 <왕의 남자> <괴물> 등이 한국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감독의 가치관까지 담아낸 것과 비교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