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중립 의무’ 탓 정치 현안 수업 어려워…‘청소년 정당’도 걸음마 수준, 실습형 교육 부족 지적
#인기 없는 선택과목 ‘정치와 법’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오 아무개 군(18)은 22대 총선 때 처음 투표권을 행사할 기회를 얻었다. 오 군에 따르면 친구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첫 투표라는 생각에 들떠 있는 학생도 있었던 반면, 아예 무관심한 친구들도 있었다. 휴일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벌이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역구 투표는 어렵지 않았다. 지역구에 나온 후보자들이 누구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례대표 투표를 할 때는 혼란을 겪었다. 51.7cm의 투표지에 40개의 정당이 나와 있었다. 어느 정당이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오 군은 털어놨다.
오 군은 투표한 다음 아쉬움이 남았다고 했다. 첫 투표인 만큼 각 후보자와 정당의 공약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다. 오 군은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어떤 후보자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서 정책에 상관없이 찍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투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학교에서는 공약이나 후보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방법을 제대로 안 알려준다. 학생들이 선거에 대해 자세한 것들을 모르고 투표장에 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오 군의 말처럼 교육 과정에서 정치 과목 비중은 작다. 현행 교육은 2015년 개정 과정을 따른다. 정치를 다루는 ‘정치와 법’은 선택 과목이다. 학생들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아니다. 1학년 때 통합사회를 공통과목으로 배우게 되지만, 정치를 다루는 부분은 인권 보장과 헌법 단원뿐이다. 2025년부터 전면 적용되는 2022년 개정 교육과정도 정치와 법은 선택 과목으로 분류된다.
정치와 법을 선택하는 학생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수능 응시자 통계에 따르면 정치와 법이 도입된 2014년 이후 응시자 수는 꾸준히 감소했다. 2024년 수능에서 정치와 법에 응시한 학생은 2만 4426명에 불과했다. 전체 수험생의 약 5% 수준이다. 투표권이 생기면서 청소년 참정권은 확대됐지만, 관련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구조인 셈이다.
일요신문이 만난 학생들은 교육 내용도 부실하다고 꼬집었다. 한 학생은 “정치에 대해 원론적인 내용만 배운다. 현실 정치에 적용해 보는 수업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며 “정치와 법을 선택한 학생들은 사실 정치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는 생각보다는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경우가 많다. 암기식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직업 교육에 특화된 특성화고 사정은 더 열악하다. 특성화고에는 정치를 따로 다루는 교과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성화고에 다니는 김 아무개 군은 “1학년 때는 사회와 사회과부도가 있고, 2학년 때는 한국사 과목이 있다. 이때 정말 짧게 배운다. 정치 관련 부분을 배우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렸던 것 같다. 내용도 투표장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군은 “그래도 정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정치 유튜브를 본다. 극단적인 성향의 정치 유튜브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이는 서유럽의 선진국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강원대학교 임유진·김명정 교수의 논문 ‘독일과 영국 청소년의 정당 활동과 정치교육-우리나라 참정권 교육에의 함의’에 따르면 영국은 1990년대 경기침체와 양극화 심화로 사회적 갈등이 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사회 통합을 위해 정치교육을 더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치교육 확대를 위해 1997년 정규 교육과정에 시민교육을 넣었다. 시민교육은 정치참여방법·선거제도·정당정치에 대한 이해·의회정치·사법제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선택 과목이지만, 중학교부터는 필수과목으로 지정돼 있다.
독일은 헌법에 정치교육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따라 중고등학교와 직업학교 학생들은 정치 관련 과목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정치 관련 수업은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학교는 일주일에 최소 1시간에서 최대 5시간까지 의무적으로 수업을 편성해야 한다.
독일의 정치교육은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기준으로 삼는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강압 금지 원칙 △논쟁 재현 원칙 △학생 중심 원칙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중 논쟁 재현 원칙은 학교 밖 사회에서 다뤄지고 있는 논쟁을 학교 수업 시간에서도 다뤄야 한다는 내용이다. 학교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학생들이 논쟁하는 것을 장려한다. 다양한 관점을 학습해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질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다만 학교 안에서 편향된 내용을 담은 정치적 홍보나 선동은 금지된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논란
일부 고등학교 교사들은 현실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토론 위주의 수업을 하거나 모의투표 등 실습형 수업을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정치적 중립 의무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했다.
이는 1960년 공무원이 관권선거에 동원됐던 3·15 부정선거 이후 공무원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교사도 공무원인 이상 이 조항을 지켜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한국만 교사의 정당 가입과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등 엄격하게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고 있다.
교실 안 분위기도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예민한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예를 들면 학생들이 장난식으로 ‘선생님 어떤 색 좋아하냐’고 묻는다. 선생님이 특정 당과 관련된 색을 말하면, 이 선생님은 어떤 정당을 지지한다는 식의 장난을 친다”며 “선생님들은 그런 장난에 대해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 있는 답변을 피한다”고 했다. 이어 이 학생은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정치와 관련된 말을 하면 그 말이 교육청이나 학부모의 귀에 들어가면 학교가 전체적으로 곤란해질 수 있다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 조 아무개 씨(47)는 선거철이 되면 일주일마다 각 시도 교육청에서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공문이 내려온다고 했다. 조 씨에 따르면 공문에는 각종 위반 사례들이 명시돼 있다. 위반 사례로는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치 관련 게시물을 올렸다가 학교에 항의 전화가 온 경우 △학생들이 정치 관련 이야기를 할 때 대화에 참여했다가 논란이 된 경우 △정당에 후원금을 냈다가 징계를 받은 경우 등이다.
조 씨는 “정당의 정책을 비교할 때 어느 정당의 정책의 문제점을 짚으면 그 행위 자체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니까 교사들이 이러한 내용을 교육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고 했다. 조 씨는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학생들에게 정당의 공약, 스스로 공약을 분석해 보는 연습, 자기 지역구 후보자들을 판단해 보는 연습 등의 실효성 있는 교육을 실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는 “(교사가) 개인 SNS에서 정치 관련 게시글을 올리면 정치 단체가 그 내용을 찍어서 고발한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며 “정당 후원금은 현재 교사가 낼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행동을 조심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학생들은 교사들의 의견에 동조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교사가 어느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다. 앞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정부 비판을 하거나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사 시험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문제가 출제돼 논란이 일었다.
#정당 교육의 부재
독일과 영국 등 서유럽 국가의 정당들은 정치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정당별로 차이가 있지만, 가입 가능 나이는 14~16세 사이다. 정당은 청소년 당원들에게 정당의 구조, 법안 발의 방법, 청소년에게 필요한 정책 청취 등의 실습형 교육을 제공한다. 두 나라에는 수십만 명의 청소년 당원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보수당은 청소년 당원에게 정당이 주관하는 봉사활동 기회를 제공한다. 청소년 당원이 고안한 정책은 보수당의 정책 연구기관에 제출된다. 관련 정책은 보수당의 당론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노동당은 지역별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관련 회의체인 전국위원회는 분기마다 회의가 개최된다. 회의 내용은 시의원에게 전달된다.
한국의 정당 가입연령은 현재 16세부터다. 20대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앞다퉈 청소년 당원을 모집했다. 민주당은 청소년당원협의체인 ‘더새파란’을 출범시켰다. 이 단체는 활동을 멈춘 것으로 보인다. 공식 SNS를 보면 2023년 5월 29일 게시글을 끝으로 다른 글은 올라오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은 청소년협의체는 따로 운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각 정당에서는 여전히 청소년 당원들이 존재한다. 민주당에서는 은평구 청소년 위원회 등 각 지역에 청소년 단체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민주당 당직자에 따르면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당원은 100여 명 수준이다. 국민의힘에서도 청소년 당원들을 중심으로 관련 단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독일과 영국의 정당에 비해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으로 평가된다.
임유진·김명정 교수는 앞서의 논문에서 “학교의 정치교육과 사회의 시민교육은 함께 발맞추어 가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며 “정당은 학교에만 지워졌던 청소년 정치교육의 짐을 함께 나누어서 질 수 있는 교육 파트너다. (정당은) 교과서에서만 가르치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학생들이 가입할 수 있고, 실제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을 경험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직 정당들은 청소년 조직의 운영 경험이 부족하다. 기성 정치의 정쟁 문화에 청소년들이 일찍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이는 경험이 쌓이면 서서히 개선될 수 있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